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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융위기를 해부한다 <下> 보안관 없고 장의사만 남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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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보안관이 사라진 자리엔 장의사가 바빠지는 법인가.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법안 통과가 삐걱거리면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 금융시장엔 긴장감이 한껏 높아졌다. 결국엔 통과될 테지만, 그때까지 견디기 어려운 은행이 많은 게 문제다. 맥없이 쓰러지는 은행들의 처리는 살아 있는 은행들과 정부가 함께 맡는 수밖에 없다. 그 최전선에 선 것이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의회에 발이 묶인 동안 FDIC는 부실 은행 처리에 여념이 없다.

 ◆부실 처리 반장 베어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가 올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가운데 2위에 오른 실러 베어 FDIC 의장. 아마 내년에는 1위에 올라도 될 법하다. 잇따라 생겨나는 부실은행들이 그의 손에 운명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1933년 설립된 FDIC는 우리의 예금보험공사처럼 은행이 부실해졌을 때 고객 예금을 대신 지급해 주는 기관이다. 또 부실은행의 관리나 청산도 맡는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기관이지만 금융위기가 터지면 바빠지는 곳이다.

최근 와코비아 은행이 씨티에 인수되는 과정에도 베어가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실해진 은행이 실제 파산하기 전에 매각이나 합병을 통해 살리자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를 위해 그는 ‘오픈 뱅크 어시스턴스(OBA)’라는 절차를 활용해 FDIC에 지원 요청을 해오는 부실은행에 대해 예금자 보호나 인수처 물색 등을 지원해 주고 있다.

OBA는 ‘파산 방지 지원 절차’로 부실은행이 파산하기 전에 지원을 해줌으로써 FDIC의 기금, 즉 국민의 세금 부담을 줄이자는 제도다. 1992년 도입됐으나 그동안 실제 적용된 적은 없다. 그러다 베어가 와코비아를 처리하면서 처음으로 발동한 것이다. 그는 “OBA는 은행업계의 신용유지에 반드시 필요하다”며 “와코비아의 고객 예금은 전액 보호받는다”고 강조했다.

미국 언론들은 정부기구가 개입해 부실은행을 대형은행에 짝지어 주는 것을 ‘억지 결혼(shotgun marriage)’이라고 부른다. 2006년 임기 5년의 FDIC 의장에 취임한 베어는 그런 결혼을 시킬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쥔 셈이다. 블룸버그 통신도 FDIC가 월가 금융위기 해결의 새로운 기대주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베어는 금융 규제정책의 전문가다.

◆소방관 버냉키

“총알이 빗발치는 참호 속에서 무신론자가 되기는 힘든 법이다. 이런 금융위기 속에서 이념론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벤 버냉키 FBR 의장이 최근 지인들에게 내비친 심정이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과 함께 밀어붙인 7000억 달러짜리 구제금융안 때문에 ‘사회주의자’ ‘수정론자’라는 비난을 받던 중이었다. 프린스턴대 교수 출신인 그는 미국 대공황 연구의 권위자다. 1929년 금융위기를 방치한 대가는 대량실업과 장기불황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시장 자율이라는 금과옥조에만 매달릴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런 생각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9월 18일 밤 워싱턴의 의사당에서였다. 버냉키 의장은 상원의원들을 앞에 놓고 ‘공황론 강의’를 했다.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버냉키의 진단은 간단명료했다.

“경제의 동맥이 막혔다. 이제 심장마비가 올 것이다.” 숨이 턱 막힌 상원의원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7000억 달러짜리 ‘사상 최대의 경제 구출작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만의 하나 구제금융 법안이 좌절될 경우 버냉키는 ‘마지막 대부자’로서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권한, 즉 발권력을 동원해 자금난에 빠진 금융사들을 지원해야 하는 입장이다. 이는 인플레 억제라는 중요한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나 같아 버냉키로서는 반드시 피하고 싶은 길이다.


◆보안관 폴슨

골드먼삭스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월가의 이름난 딜메이커였다. CEO 시절 중요한 투자건은 언제나 그의 손을 거쳤다. 하루하루를 전쟁 치르듯 살았다.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도 재무장관이 되고서는 철두철미한 시장주의자로만 행세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시장을 믿는다. 또 정부도 역할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시장에 충실하되 경우에 따라서는 규제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과거 입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1990년대 말 일본이 부실은행들을 껴안고 가려 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부실은행)을 망하게 하지 않으면 일본 사회와 시장에 무거운 세금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위기를 진화해야 할 소방수 입장이 되면 생각도 바뀌는 모양이다. 그는 9월 17일 오후 버냉키와 긴 통화를 했다. AIG에 85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지만 시장의 불안은 극단으로 치달을 기세였다. 서로 고민하며 주춤주춤하다가는 결국 폴슨이 결론을 냈다. “오직 하나의 선택밖에 없었다. 그것은 압도적으로 명백했다.”

◆사냥꾼 팬디트

“급히 할 얘기가 있습니다. 만납시다.” 9월 25일 오전 뉴욕 씨티그룹 본사. 비크람 팬디트 회장에게 긴급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미국 4위 은행인 와코비아의 CEO 로버트 스틸이었다. 미 최대 저축은행이던 워싱턴뮤추얼(WM)이 JP모건체이스에 넘어가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인수협상 끝에 29일 결국 와코비아는 씨티그룹 품에 안겼다. 여기엔 물론 베어 FDIC 의장의 중재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번 거래는 씨티그룹으로선 모험이다. 씨티 역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곤욕을 치렀다. 지난해 이후 씨티의 자산상각액은 400억 달러를 넘어섰고, 3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 대규모 구조조정도 뒤따랐다. 인수 직후 신용평가사들은 씨티에 신용등급이 내려갈 수 있다는 경고를 했다. 하지만 팬디트 회장은 “위험은 있지만 큰돈을 벌 수 있는 딜”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 속에는 언젠가 혼돈과 불안이 가시고 미국 경제도 활력을 되찾을 것이란 믿음이 숨어 있다. 그때가 오면 와코비아의 광대한 지점망이 위력을 발휘할 것이란 기대다.

조민근 기자, 일러스트=박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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