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세계사] 하얀 자전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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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6월 네덜란드인들이 뿔났다. 베아트릭스 공주(현재 여왕)가 독일 외교관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와 약혼했기 때문이다. 나치 침략의 아픈 기억이 가시기도 전에 히틀러유겐트 출신에 제2차 세계대전 참전까지 한 독일인 부마라니.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한 무리의 젊은이가 왕실 전용 보트에 결혼 반대 유인물을 뿌렸다. 그해 5월에 결성한 대항문화그룹 프로보의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이 일로 해서 유명해졌다.

프로보는 히피보다 앞서 나왔던 젊은이들의 반항 운동이다. 65년부터 67년까지 같은 이름의 잡지를 내며 활동하다 사라졌다. 프로보는 ‘문제를 일으키는 젊은이들’이라는 뜻의 학술용어다. 이론가인 로엘 반다이크는 “아나키즘, 다다이즘, 마르쿠제(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 사드 후작(사디즘이란 용어의 기원이 된 남자)을 결합한 운동”이라고 아리송하게 규정했다.

부조리에 대한 저항도 재미있게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들은 66년 3월 공주 결혼식을 앞두고 ‘하얀 거짓말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율리아나 여왕이 ‘딸이 미워 아나키스트로 전향하고 프로보와 권력 이양 문제를 의논하고 있다’고 발표하는 가짜 연설문을 유포했다. 수돗물에 환각제 LSD를 타서 시민들을 몽롱하게 한 뒤 결혼식을 난장판으로 만들 것이란 헛소문도 냈다. 여기에 넘어간 당국은 2만5000여 명의 군경을 동원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당시 결혼 반대 시위대는 ‘내 자전거를 돌려다오’라는 구호를 외쳤다. 독일군에 자전거를 징발당했던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프로보 활동을 하다 67년 암스테르담 시의원이 된 산업디자이너 루드 쉼멜페닝크는 여기에서 영감을 얻었을까. 시 당국에 2만 대의 흰색 자전거를 구입해 시민들이 공짜로 이용하게 하자는 ‘하얀 자전거 계획’을 제안했다. 자전거를 대안 교통수단으로 보급해 고질적인 교통체증을 해소하고 환경오염도 줄이자는 공용 자전거제, 또는 자전거 무료 대여제는 이렇게 탄생했다.

시 당국이 콧방귀를 뀌자 그는 50대의 자전거를 직접 구해 시내 곳곳에 풀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두 손을 들었다. 자전거를 모두 도둑맞은 것이다.
그의 아이디어는 죽지 않고 다만 사라졌을 뿐이다. 95년 덴마크 코펜하겐은 도난 방지를 위해 파격적인 디자인의 자전거를 채택해 성공을 거뒀다.

공용 자전거제는 이제 시대의 도도한 흐름이다. 2000년에는 독일의 뮌헨과 핀란드의 헬싱키가, 2003년에는 독일 베를린과 오스트리아 빈이 도입했다. 2005년 프랑스 리옹, 2007년엔 스페인 바르셀로나·세비야, 프랑스 파리가 동참했다. 올해 8월엔 미국 수도 워싱턴에 스마트바이크DC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한국에서도 자전거를 대안 교통수단으로 쓰자는 운동이 직장인과 지자체를 중심으로 확산하더니 이제 중앙정부까지 나섰다는 소식이다. ‘삼 보 이상 무조건 승차’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우리의 자동차 중독증이 이제 임자를 만났다.

채인택 피플·위크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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