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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잠자는 와인을 깨우는 작업 '디캔팅(Decanting)'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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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인 디캔팅(Decanting)하시겠습니까?” 라고 어느 고급 와인 바의 소믈리에가 와인을 주문한 고객에게 정중히 물어 본다. 일행 중 한 명이 주문했던 와인은 이탈리아 피에몬떼 지방에서 생산되는 바롤로(Barolo)라는 꽤 강건하고 묵직한 스타일의 고급 와인이었다.

고객의 승인과 함께 소믈리에는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고급 유리 디캔터(Decanter)와 초를 준비해 가지고 왔다. 능숙하게 코르크 마개를 딴 후 주문한 고객에게 마개를 확인해 보인다. 고객은 코르크 마개의 상태를 살펴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후, 소믈리에는 병에 있었던 와인을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능숙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투명한 디켄터에 따른다. 그 아래 비추어진 촛불은 와인 병에서 디캔터로 흘러 드는 루비 색 와인을 더욱 투명하게 반짝인다.

마치 무슨 의식처럼 행해지는 이 작업은 소믈리에 경연대회에서도 중요하게 다룰 정도인데 디캔팅의 멋지고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소믈리에들은 많은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씩 “이 와인을 ‘신의 물방울’처럼 디캔팅 해주세요” 라는 주문에 소믈리에들이 곤혹스러워 하기도 한다고… 일본 와인만화 ‘신의 물방울’ 에서는 주인공이 와인 병을 높이 쳐들어 가늘고 긴 명주 실을 뽑듯 와인을 디캔터에 따르는 모습에 대하여 한동안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똑같이 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와 유사하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단지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닐까 라고 생각 해본다.

와인을 디캔팅하는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가장 원초적인 목적은 탄닌이 많아 묵직한 스타일의 와인들이나 오래된 와인들의 경우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찌꺼기를 분리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초를 밝혀 디캔터로 옮겨지는 와인에서 찌꺼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또 한가지는 영 빈티지 와인의 경우 와인 병을 금방 따면 발효과정에서 생겨났던 유황과 같은 잡냄새를 빨리 없애고 과일의 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며 탄닌으로 인한 단단한 와인을 유연하고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한기도 한다.”

“이 와인이 입을 꽉 다물고 있네” 바롤로를 시킨 친구가 디캔터를 들고 크게 원을 그리듯 한 바퀴 돌리며 중얼거린다. 10년 정도 된 이 바롤로의 묵직함이 꽤 기대가 되었지만 와인 향기의 꽃이 피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 와인이 입을 열려면 한 2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까 우리 화이트 와인이라도 마시면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라며 그는 다시 소믈리에를 부른다.

수 년 혹은 수십 년간 잠잤던 꽤 묵직하고 단단한 느낌의 이 레드 와인을 따면 처음에는 특별히 매력스러운 향기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디캔팅 작업을 하고 기다리다 보면 와인은 공기와의 접촉을 통해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치 꽃이 피어나듯 향기를 발산하게 된다.

영(Young)와인이든 올드(Old) 와인이든 와인의 맛과 향기가 최대 정점에 도달했을 때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이 정점을 놓쳐 너무 산화가 되었다면 와인은 향기를 잃어버리고 맛은 식초처럼 신맛이 강해지거나 맹물을 탄 것처럼 밍밍해 진다. 그리고 와인 향기의 꽃이 피기도 전에 너무 성급하게 빨리 마셔 버리면 그 와인이 표현하는 진정한 모습을 못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와인은 매 분마다 산소와의 접촉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는데, 마시는 순간 순간마다 와인의 향기와 혀에서 느껴지는 맛의 차이를 즐기는 재미가 있다.

“이봐요 소믈리에… 나도 디캔팅 좀 해주세요” 라고 옆 테이블에서 진행되는 디캔팅 모습을 보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최근 들어 와인 바나 와인을 갖추고 있는 레스토랑에서는 와인을 주문하는 손님들이 ‘디캔팅’을 해달라는 요청이 부쩍 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와인은 모두 디캔팅을 해야 하나?

아니다! 모든 와인이 디캔팅의 대상은 아니다. 와인에 따라 달라지며 개인 취향에 따라 주관적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잠자는 와인을 빨리 깨우고 싶다면 디캔팅을 해도 좋을 것이나 과다한 공기 접촉으로 인해 와인 향기의 정점을 놓치고 오히려 산화될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보졸레나 부르고뉴의 가벼운 스타일의 와인들은 디캔팅이 필요 없는 경우가 많다. 칠레나 호주와 같은 중저가의 와인들 중 묵직한 바디 감과 탄닌이 주는 레드 와인의 적절한 거친 맛을 그대로 즐기고 싶다면 디캔팅을 권장하지 않는다. 디캔팅을 통한 너무 많은 공기 접촉은 오히려 와인은 너무 유연해지며 향기는 단순해 질 수 있다. 대체적으로 신대륙의 와인들은 바로 따서 마셔도 좋은 와인들이 많은 편이다.

디캔팅을 통해 빛을 발하는 와인을 이야기 하라면 프랑스의 경우 보르도나 론 지방의 대부분의 강인한 와인들 그리고 이태리의 바롤로나 바르바레스코와 같은 조밀하고 단단한 느낌의 와인들이나 스페인의 리오하 와 같은 꽤 풀 바디의 강인하면서도 단단하여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듯한 느낌의 와인들이 될 것이다. 이러한 와인들은 와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게는 1시간 많게는 2시간 이상 디캔팅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디캔팅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럽다면 와인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레스토랑이나 와인 바의 소믈리에나 함께한 전문가와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면 본인 스스로 직접 체험하면서 내공을 쌓은 방법도 있을 것이다.

최성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