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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이들, 거리를 뜨겁게, 삶을 열정적으로!

중앙일보

입력

T.I.P. 낯선 이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알아두어야 할 이름이다. T.I.P.는 지난 2007년 영국 비보이 챔피언 대회에서 최고 성적을 거두며 세계를 열광시킨 국내 비보이 그룹이다. 하지만 지금 하려는 얘기는 지난해 T.I.P.의 활약상이 아니다. 오늘 10월에 열릴 세계 대회만 해도 무려 세 개다. T.I.P.는 지난해의 영광을 다시 현재형과 미래형을 만들기 위해 한창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다. 거리를 가장 열정적으로, 가장 뜨겁게 만드는 주인공들인 비보이들은 우선 자기 삶부터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의 작업실에서 팀의 리더이자 서울예종 교수 황대균(29세) 씨를 만나 비보이로 사는 법을 들어보았다.

앞줄, 파란색 모자를 쓴 황대균씨

Walkholic(이하 WH) 1990년대 중반에 결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제법 긴 역사다.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황대균(이하 황) 지금 우리 팀의 고정 멤버는 나를 포함해서 16명 정도다. 그 밖에 예닐곱 명 정도는 상황에 따라서 같이 할 때도 있고. 들락날락한다고 보면 된다. 고정 멤버들은 최소 5년 이상 동고동락한 사이다. 이젠 얼굴만 봐도 그날 컨디션이 어떤지 대강 답이 나온다.
팀을 결성한 것은 1996년 일이다.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국내에서 우리 팀이 가장 오래됐다. 거창하게 뭔가를 할 생각으로 도원결의를 했던 것이 아니라, 동네(수서)에서 춤추기 좋아하는 아이들끼리 모여 놀다보니 자연스럽게 팀을 꾸리게 됐다. 지금처럼 거리에서 공연을 하거나 퍼포먼스를 하는 문화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때다. 당연히 부모님들의 걱정도 태산 같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도 결코 곱지 않았다. 영화나 매스컴에서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들, 혹은 다소 껄렁껄렁한 모습들 때문에 우리가 뭐하는지 관심을 갖기 보다는 선입견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는 게 자화자찬처럼 들리겠지만, 춤추는 사람들 대부분 착하다. 춤 외에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행여 길에서 공연을 하다가 시비가 붙어도 우리는 몸 상할까봐 되도록 충돌을 피한다. 가능하면 좋은 분위기로 공연을 마치려고 우리가 먼저 숙인다. 춤추는 것 자체를 탈선이나 일탈로 바라보는 시선을 극복하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오랫동안 활동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수상도 하고 활동 반경도 넓어졌다. 그게 결국 부모님이나 지인들에게 인정받게 된 계기가 됐다. 우리가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사람들도 아니고, 아직도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도 처음 시작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큰 성공을 한 것이다. (웃음)

WH 그 동안의 수상경력이 화려하다. 예전과 비교해서 어떤 점들이 달라졌나?
작년에 제 1회 비보이문화상에서 단체상을 받았고, 영국의 비보이 챔피언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그2001년에는 독일 배틀에서 베스트쇼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계권 대회에서 수상을 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파급 효과가 훨씬 크더라. 이전보다 공연 수익료가 더 많아졌다. 빅뱅이나 이효리같은 스타들과 뮤직비디오도 찍게 됐고, 개별적으로 광고를 찍는 친구들도 생겼다. 뮤지컬에서도 비보이들이 활약할 수 있게 됐다. 아, 영화에도 출연한다. <비버리힐즈 닌자>라는 영화에서 조연급으로 나와 우리의 춤을 보여주게 된다. 이런 것들이 우리 팀 자체로도 영광이지만, 이로 인해서 거리에서 공연하는 비보이들의 무대가 더 확장되고, 거리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즐거움도 더 커진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완전히 형편이 풀린 건 아니다. 대부분은 춤과 관련된 직종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지만, 이제 막 입문한 막내들은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생활하기도 한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 많다. 길을 잘 닦아 놓아야 후배들이 진출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다. 누군가는 나처럼 학교에서 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 동료들처럼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현재가 후배들의 비전이 된다는 점에서 책임감을 크게 느낀다.

WH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주목받고 있고, 팀의 활약도 눈부시지만, 비보이 문화의 현주소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점점 좋아지고 있는 중이다. 뿌리를 단단하게 다지고 있다. 그런데도 염려하는 점이 있긴 하다. 거품이 많기 때문이다. 언론이나 방송으로는 아무래도 너무 화려한 모습만 비춰진다. 어린 친구들이 매스컴을 통해서 춤에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춤을 추면서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알기보다 겉멋이 먼저 드는 경우도 있다. 진정한 댄서가 되려면 춤벌레가 돼야한다. 판검사가 되기 위해 공부벌레가 돼야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하루 다섯 시간 이상의 연습은 기본이고 그 밖의 시간에는 호구지책을 해결하는 한편 이론적인 공부도 병행해야 한다. 남들이 크게 알아주지도 않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실상 해야 할 일은 다른 직업보다 배가 더 많다. 그러니 화려한 모습만을 생각하고 어설프게 도전했다가 그만두는 후배들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 연습실에 찾아온 친구들만 해도 백 명 중 한 두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시간낭비만 하고 돌아간다. 무슨 일이든지 마찬가지지만 진정한 비보이가 되려면 기본기부터 닦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일이 미치도록 좋아서 환장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열정은 타고나야 하고 또 목표가 확실해야 한다.
삼년 째 청소만 하고 있는 우리 팀의 막내는 지금도 기본기만 닦고 있는데도 늘 표정이 살아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니까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행복하다. 비보이 문화가 이단아들의 향연장으로 치부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운 좋으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받는 연예인처럼 조명하는 것도 이제 그만 멈추었으면 한다. 길거리를 아름답고 역동적으로 수놓는 우리의 비보이 문화가 좀 더 진지하게 다뤄지고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WH 비보이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아무래도 선입견이 가장 힘들다. 힙합 복장이나 우리가 사용하는 리드미컬한 대화체 같은 게 아직도 불량하게 보이는 것 같다. 우리가 들어선 길이니 우리가 이걸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홍보활동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닌가 반성도 한다. 사실 비보이 배틀을 보면 상당히 역동적이기 때문에 공격적이라고 비쳐지는 면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춤대결을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한 재미의 요소이지 정말로 각각의 댄서들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니다.
무대에서 상대방 팀을 짓궂게 놀리기도 하고 격한 동작으로 기 죽이는 행위를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모두 댄스배틀을 위한 연출 일 뿐이다. 무대 밑으로 내려오면 내편 상대편 가리지 않고 다 함께 뜨겁게 포옹하며 마무리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 모습이다. 남들이 보면 닭살이 돋는다고 할 만큼 활동하는 여러 팀들이 모두 사이가 좋다. 더 좋은 동작을 연구하며 고민하는 것도 각 팀들의 온라인 카페나 미니홈피를 통해서 자유롭게 공개하고 교환하는데 서로에게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우리의 건전하고 다정한 내면을 사람들에게 좀 더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따로 시간을 내고 예산을 책정해서 국내에서 활동하는 비보이들의 모임을 주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생각한다.

WH 그래도 라이벌과 멘토를 각각 꼽을 수 있을 텐데?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춤꾼의 실력은 연습량에 따라서 급격하게 달라진다. 하루아침에 일인자 자리가 바뀐다. 그래서 누가 일인자다, 누가 최고다, 이런 소리가 조금 우습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열정적으로 활동할 때는 그 사람을 자극시키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충격적인 자극을 받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라이벌이 되고 곧 멘토가 된다. 현재는 국외보다는 국내에 좋은 그룹이 많은데 지금 당장 생각나는 팀은 ‘리버스, 갬블러, 드리프터스’가 있다. 정말 훌륭한 팀들이다. 그 외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 비보이들 중에서도 혀를 내두를 만큼 쟁쟁한 실력가들이 많다. 시간이 갈수록 나보다 더 훌륭한 춤꾼들이 더 많이 등장할 거다.
여기서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팀원들과의 조화다. 기본적으로는 멤버들 각자 스타일대로 자연스럽게 연습하면서 개인기를 익힌다. 하지만 서로 피 튀기는 경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춤을 추는 거지, 1등을 하려고 춤을 추는 게 아니다. 서로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자극을 주는 건 기본이지만, 춤 때문에 피폐해지고 싶지는 않다. 우리 팀이 지금 일인자로 알려져서 정말 기쁘지만, 이 자리의 주인은 항상 바뀐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많은 비보이들은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 거의 모두 일인자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로가 서로의 스승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의 팀 이름도 티아이지(Team work Is Perfect)다.

WH 앞으로 계획과 꿈을 말해 달라.
비보이는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가난했던 시절 자신감이 부족하고 우울했던 내 세계를 송두리 째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춤꾼의 반열에 올라간 것만도 영광인데 수백 명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라는 타이틀도 안겨주지 않았나. 비보이는 그 자체로 나에게는 꿈이고 희망이다. 나는 이러한 내 경험을 보다 많은 비보이들이 누리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거리의 수많은 비보이들이 제대로 된 대전료를 받고 배틀을 할 수 있게끔 기반을 조성할 생각이다. 그리고 비보이 뮤지컬과 같은 행사를 직접 제작하여 그 수익을 공연자와 관람자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을만한 구도를 반드시 만들고야 말겠다. 그것만이 내가 비보이로서 누린 행복을 이 사회에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WH 비보이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무엇 때문에 비보이가 되고 싶은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춤이 좋아서 죽고 못 살겠다는 답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비보이가 될 자격이 있다. 부모님을 불안하게 만들고 자기 생활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은 비보이가 될 자격이 없다.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면서 주변에 좋은 비보이 선배들을 여럿 두고 활동하다 보면 서서히 부모님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 작업실을 통해서 연습을 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지금도 많은 친구들이 작업실을 찾아와서 연습해도 되냐고 묻는데 오디션을 보거나 가입비를 받는 일이 전혀 없다. 누구든지 춤을 추고 싶으면 찾아와서 추면된다. 다만 무엇이든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각오만 돼 있다면 훌륭한 비보이가 될 수 있으니 도전해보시라.

워크홀릭 담당기자 장치선 charity1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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