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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영화 "이레이저 헤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각양각색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문화상품이 쏟아지는 오늘의 대중문화를 바르게 읽는 방법은 매우 중요합니다.중앙일보는 일요일자에 문화리뷰면을 신설,독자 여러분의 대중문화 읽기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영화.연극.방송.가요등 대표적인 대중장르를 각분야의 주목받는 신진 전문가들이 참신한 시각으로 진단하는 이 문화리뷰에 독자 여러분의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註] 검은 공간,옆으로 뉘어져있는 얼굴,보이지 않는머리,놀란 눈,그위에 이중노출된 둥그런 위성모양의 정충,음산한음향. 영화는 처음부터 삐딱하다.
주인공은 왠지 기형적이며 우주는 어딘지 미심쩍다.사건은 부조리하고 환상적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그의 장편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를 공포영화와 애니메이션,혹은 코미디와 전위영화의 믹서기로 만들었다.
가족과 성(性)의 위엄이 추락한 그 자리에서 현대영화의 장르와 문법은 규칙없이 뒤엉키고 관객의 영화적 수용자세는 혼선을 빚는다. 주인공 헨리 스펜서.어울리지 않는 검은 정장에 부스스한 곱슬머리,짧은 바지,흰 양말,목을 옥죄는 넥타이.그는 간다. 위협적으로 튀어나온 쇠파이프를 지나,회색건물을 지나,무덤같이 둥근 흙더미를 지나 자신의 아파트로.괴기스러운 복도를 가로질러 도대체 닫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감옥같은 방으로.
그때 옛애인 메리로부터 저녁을 같이 하자는 기별을 받는다.그는 다시 간다.공장지대의 황량한 배경을 헤치며 해괴한 만찬이 기다리는 메리의 집으로.
그러나 저녁은 핑계였다.메리 어머니는 죽일듯이 그를 닦달하고그는 마침내 그녀와 관계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메리가 낳은 미숙아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이다.
물론 진짜 그의 아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다만 이제부터 영화는 성생활없이 낳은 아기,느닷없이 만든 가족,어느틈에 아버지가되어버린 인생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독의 관심은 가족이 아니라 가족관계다.
공포가 아니라 공포의 상상력이고 절망이 아니라 절망의 영화적조형성이다.그래서 『이레이저 헤드』의 시체처럼 살아있는 할머니,왜소하고 무기력한 아버지,발작적인 어머니,무책임한 딸,답답한사위는 출구없는 방에 갇혀 말라버린 탁자 위 나무처럼 기괴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모든 정상성은 이 공간 안에서 조롱당한다.남성의 음경은 끔찍하게 길고 여성의 음부는 불길하게 깊다.
둘이 만난 자리에는 저 아기같지 않은 아기,즉 강아지 머리에기생충의 몸을 한 신생아가 있다.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모르는 가부장 헨리는 피하고 싶었다.
이웃집 여인에게 아이없이 홀가분한 몸으로,즉 자기가 저지른 죄의 유산없이 홀홀단신으로,그래서 그는 아기이자 귀찮은 애물이고 징그런 괴물을 거세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우리들의 아버지」의 머리통은 세상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감독은 마치 지우개공장으로 달음박질치는 아이처럼 이성의 머리를 들고 극장으로 달려온 것이다.
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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