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조용헌의 江湖동양학] 日帝 묵념 사이렌 때 꼿꼿이 고개 쳐든 배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표주(漂周)'라는 게 있다. 돈 한푼 없이 주유천하하는 것을 말한다. 돈을 가지고 다니는 여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유람이지만, 돈 없이 빈손으로 다니는 여행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수행에 속한다.

중국의 오악(五嶽) 중에서 가장 험난한 산이 화산(華山)이다. 도가의 명문인 화산파(華山派)에서는 그 문하생들에게 3년 동안 반드시 '표주'의 과정을 겪도록 시킨다고 한다. 표주를 시키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혼자 자립할 수 있는 자생력을 키우기 위함이고, 둘째는 세간의 밑바닥 인심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고, 셋째는 자기를 낮추는 마음, 즉 '굴기하심(屈己下心)'을 연마하기 위해서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화산파 22대 장문인인 조상진(曺祥眞:1924~ )도사로부터 들었다. 표주야말로 도사 커리큘럼의 필수과목이라는 것이다. 돈 없이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주특기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가장 필요한 기술이 의술이다. 그래서 표주에 나설 때는 보따리에다가 몇 가지 한약재와 침을 휴대하고 다닌다. 아픈 사람을 고쳐줄 때 가장 효과가 크다. 그 다음에는 '만세력'을 가지고 다닌다. 궁합이나 택일.작명뿐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상담해 주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서 자기 운명에 무관심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 다음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와 같은 어휘사전도 지니고 다닌다. 사랑채에서 주인집 아들의 훈장노릇을 해야만 하는 상황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표주에 나서는 도사들은 인체의 구조에 대해 통달해야 하고, 주역과 사주에 능하며, 고금의 경전과 문장에 해박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어떤 산골 오지에 떨어뜨려 놓더라도 절대 굶어죽는 일은 없다.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한 코는 걸리게 되어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야산 이달도 정처없이 전국을 방랑했다. 돈 한푼 없는 빈 몸으로도 그가 주유천하할 수 있었던 원인은 이와 같은 의술.역술.학술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님 3년상이 끝나던 해인 28세(1916년)부터 35세(1923년)까지 금강산을 시작으로 해서 조선의 명산대천을 방랑한다. 대략 7년간이다. 유년시절에 이미 신동 소리를 들었던 그에게, 만약 7년간의 방랑생활이 없었더라면 거만한 천재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인간형이 되었겠지만, 배고픈 민초들과의 스킨십을 통해 그는 천재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유아독존'의 부덕(不德)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느날 저녁 무렵에 야산은 김제의 어느 부잣집에 들렀다. 주인에게 하룻밤 머물기를 청했으나 간단하게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마침 기둥에 붙어 있는 주련을 보니까 '千里他鄕에 喜逢故人이라'고 써 있었다. '천리타향에서 아는 사람을 기쁘게 만난다'는 뜻이다. 자기 집 주련 글씨는 이렇게 써 놓고 찾아온 나그네를 박대하는 주인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야산은 성질이 괄괄해서 한방 질러버리는 스타일이었다. "너는 이 글을 붙일 자격이 없다"고 일갈한 다음에, 이 주련을 떼어서 불살라버렸다. 주인이 주재소에 신고해서 일본경찰이 출동했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옆집 노인이 중재를 하는 통에 유야무야 넘어가기도 했다. 그날 밤은 옆집 노인 집에서 신세를 져야만 했다. 천하의 야산도 이러한 박대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왜정 때는 한낮 열두시가 되면 '오 ~ '하고 사이렌이 울렸다. 정오에 이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누구를 막론하고 무조건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묵념을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만약 묵념을 하지 않으면 순사에게 끌려가 곤욕을 치르게 된다. 어느날 야산이 주재소 앞을 지나다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묵념을 올리는데, 야산은 고개를 치켜들고 꼿꼿하게 걸어가는 게 아닌가. 일본 경찰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주재소에 연행된 야산은 그 이유를 추궁당하자 다음과 같이 호통을 쳤다고 한다. "내 조카놈이 관청 높은 자리에 있는데 이놈이 집에 오면 나보고 삼촌 정오가 되면 '오 ~ '하고 사이렌이 붑니다. 그때는 반드시 얼굴을 숙이고 눈을 감으면서 대일본제국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는 철석같이 그 말을 믿고 조금 전에도 고개를 숙이고 묵도를 했는데 안 했다니 그 무슨 말인가? 너는 내가 묵도하지 않는 것을 보았던 말이냐? 네가 제대로 묵도를 했다면 어떻게 옆 사람을 훔쳐 볼 수 있단 말이냐? 진정 묵도하지 않은 놈은 바로 너구나? 네놈은 정녕 황국신민이 아니구나?"

논리적으로 볼 때 야산의 호통은 아귀가 맞았다. 일본 순사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냥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표주를 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기지와 배짱도 갖추어야 한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江湖東洋學 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