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을 꿈꾼 청년, 인생의 ‘화룡점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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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인(天地人)이 하나 될 때 비로소 멋진 와인이 탄생한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꿈을 잊지 않고 실현해 낸 스테파노 신치니의 사연은 좀 더 드라마틱한 여운을 느끼게 한다.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 또는 붉게 물든 만월을 연상시키는 ‘피아니로시 솔루스’ 2005년산의 레이블 이야기를 소개한다.

상아색 바탕 위에 새겨 넣은 붉은 점 하나. 그리고 맨 아래쪽에는 피아니로시 솔루스(Pianirossi Solus·유일한 붉은 평원)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붉은 점은 다름 아닌 붉은 토양을 의미한다. 동양적인 여백을 최대한 살린 이 아름다운 그림은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토스카나 지방 맨 아래쪽 마렘마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레이블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와인의 첫 빈티지가 2005년이라는 사실이다. 필자는 이 와인의 레이블이 만들어지기 전에 와이너리를 방문해 주인 스테파노 신치니를 만났고, 나중에 다시 보았을 때 누구보다 처음으로 그가 디자인한 레이블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레이블을 보고 스테파노에게 한 필자의 첫마디는 “화룡점정”이었고, 그 뜻을 설명해 주자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이 와인이 탄생하기까지는 아주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핵심은 젊은 시절 모든 사람이 꿈꾸었을 만한 내용이다. 스테파노는 대학을 시에나에서 다녔다. 일반 이탈리아 청년처럼 밝고 쾌활한 젊은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그와 친구들에게는 꿈이 하나 있었다. 우선 성공하는 것, 그리고 인생 말년에 자신들이 사랑하는 포도원과 올리브 농장을 만들고 가꾸며 생의 마지막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정년퇴직 후 전원으로 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남은 생을 즐기고 싶어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꿈이다. 이처럼 많은 이탈리아인은 자신이 점찍어 둔 지역에 포도밭을 조성하고 와인을 만들어 사랑하는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와인을 즐기는 꿈을 꾼다고 한다. 그러니까 와인과 포도원은 그들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아련한 희망 같은 것이다.

이런 꿈을 갖고 있던 젊은 이탈리아 청년은 정말 인생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지금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패션 하우스 토즈(Tod’s)의 사장이 된 것이다. 그가 만든 신발은 명품이 되어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전 세계를 뛰어다니며 마케팅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회사도, 본인 자신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다.

마침내 그는 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과 비슷한 풍경과 향기를 갖고 있는 지역에 포도밭을 마련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토스카나에서 와인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마렘마 지역에 그만의 포도원을 조성한다. 1999년이 이 대지와 첫 인연을 맺은 때다. 비록 위치는 외졌지만 바다에서 멀지 않아 그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나지막한 언덕들이 서로 굽이치고 있어 포도나무를 가꾸기에 적당하다고 판단했고, 무엇보다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스테파노는 곧 세계적인 양조가들과 조우해 최고의 와인 제조 팀을 만들었고 모든 언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있는 집도 지었다. 필자가 그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아직 집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전망대로 쓰이는 테라스는 정리돼 있었다. 스테파노는 바로 그 테라스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공들여 만든 레이블 없는 와인을 오픈해 주었다. 필자는 나를 마중 나오며 사 왔다는 아니스 향이 들어간 둥근 빵을 안주 삼아 스테파노의 와인을 음미해 보았다.

와인은 아직 병입할 단계까지 숙성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특유의 맛을 모두 뿜어내지는 않았다. 스테파노는 이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유명 포도 품종을 함께 사용해 줄 것을 양조팀에 요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지역 전통 품종인 산조베제와 몬테풀치아노가 40%씩 들어갔고, 알리칸데 부셰가 20% 섞여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유일한 와인(품종 브랜드 측면에서)이 만들어졌다.

그 후로 1년이 지나 붉은 점 하나를 레이블에 달고 나온 와인은 열자마자 자신만의 독특함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붉은 과일 향과 허브 향, 그리고 드라이하지만 균형이 적당히 잡혀 마시기에 편했고 토양의 미네랄도 느껴졌다.

서울에서 이 와인을 다시 마시며 필자는 그 붉은 점 속에 응집돼 있는 붉은 토양의 기운과 한 젊은 청년의 꿈을 새삼 느낀다. 인간이 꿈을 꾼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천고마비의 계절, 조용한 휴일을 틈타 꿈을 이룬 한 청년의 와인을 음미하며 잠시나마 우리들의 잃어버린 꿈을 뒤돌아보는 것은 어떨지….

김혁 hkim@podoplaz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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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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