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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안 처리 불발 … 12일 새벽 무슨 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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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땅땅땅.”

11일 오후 11시30분. 이한구(한나라당) 국회 예산결산특위 위원장이 의사봉을 내리치며 추가경정예산안(추경안) 소위 통과를 알렸다. 민주당 최인기·우제창 의원이 “여당이 독단적으로 처리한다”며 퇴장한 직후였다. 추경안은 예결위 전체회의로 넘어갔고, 한나라당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 시각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홍준표 원내대표와 임태희 정책위의장 등 당 지도부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국회 예결위 한나라당 소속 위원들 중 불참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그러나 29명의 한나라당 예결위원 가운데 7명이 지역구에 있다며 ‘참석 불가’를 알렸다. 자유선진당과 친박연대 의원 3명을 합친 숫자는 25명. 의결정족수인 과반에 한 명이 부족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추경예산안 처리를 기다리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12일 오전 3시34분쯤 의원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있다. [김형수 기자]

자정이 가까워지자 한나라당은 불참한 황영철 의원 대신 원내부대표인 박준선 의원을 예결위원으로 사·보임하기로 했다. 12일 0시5분, 당 사무처는 사·보임 서류를 국회 의사과에 접수시켰다. 박 의원은 예결위장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의사봉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본회의가 소집됐다. 추경안은 그렇게 확정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 예결위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민주당 관계자가 사·보임 통보도 없이 추경안을 황급히 처리하는 모습에 의문을 품고 국회 의사과에 절차의 적법성을 문의했다. 확인 결과 추경안이 통과된 시각은 0시6분이었지만 사·보임이 확정된 것은 0시32분이었다. 선수 교체가 확정되기 전에 대타가 타석에 들어선 셈이다. 의사과는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한나라당은 예결위를 다시 열어 재의결하기로 했지만 이미 이한구 위원장이 산회를 알리는 방망이를 두드린 후였다. 국회법상 산회를 한번 선포하면 같은 날 회의를 다시 열 수 없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추경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 의장은 “3개 원내교섭단체 가운데 한 곳의 요청만으로 직권상정할 경우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며 거부했다. 홍 원내대표가 자유선진당 권선택 원내대표를 상대로 “직권상정을 같이 요청하자”고 설득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전날 오후 10시부터 국회에서 표결을 기다리던 이회창 총재가 “절차상 하자가 있어 협조할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한나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의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흩어졌다. 이 자리에서 홍준표 원내대표는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 의사를 내비쳤다. 그 사이 김형오 의장이 공관으로 퇴근했고, 추경안 해프닝은 일단락됐다. 한나라당은 추석 연휴 이후 추경안을 통과시킨다는 방침이다.

◆친박 의원들의 비협조 탓?=예결위에 불참한 의원 7명 가운데 4명(유기준·유승민·이계진·이진복 의원)은 소위 ‘친박근혜’ 그룹으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여권 일각에선 “친박 의원들의 비협조로 추경안 처리를 못했다”는 불만이 나왔다. 이에 대해 해당 의원들은 “지역구 행사가 미리 잡혀 있었을 뿐”이라며 “계파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차원적인 생각”이라고 일축했다.

권호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사·보임=국회 상임위(특위) 활동 중 의원에게 사정이 생겨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 그 의원을 해당 위원회에서 제외하고 대신 그 자리에 다른 의원을 임명하는 행위. 국회법상 ‘사·보임’의 경우 의사과에서 요구서를 접수한 뒤 해당 위원회에 변경 통지 공문을 보내야 비로소 효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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