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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휠체어 타고 근육 단련 … 호박에 점 찍어 주사 놓기 연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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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승복 교수가 휠체어를 탄 채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승복 교수 제공]

 미국 존스 홉킨스 의대의 이승복(43·재활의학) 교수는 한때 촉망 받던 체조선수로 올림픽 금메달을 꿈꿨다. 하지만 18살 때 사고로 목 아래를 거의 못 쓰는 중증 장애인이 되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대신 지독한 노력 끝에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어 장애인들을 돌보고 있다.

그는 요즘 지난 일들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리고 있다. 이 교수는 최근 통화에서 “지난달 베이징 올림픽 기간 중 체조 경기 중계를 뚫어져라 지켜봤으며, 이달 6일 개막한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 경기도 챙겨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올림픽 체조 경기를 보면서 미처 못다 이룬 꿈을 아련히 떠올리고, 장애인 올림픽을 보며 불굴의 의지를 되새기고 있다.

8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11살 때 체조를 시작했다. 루마니아 출신 여자 체조선수 나디아 코마네치의 연기를 본 것이 계기였다. 코마네치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체조 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으며 3관왕에 올랐다. 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바람을 뒤로 하고 그는 체조에 몰두했다. 입문한 지 3년 만에 뉴욕주 체조대회에서 마루운동 부문 1등을 했다.

시련이 닥친 것은 18살 때. 코치의 지시를 어기고 혼자서 공중돌기를 하다 다친 것이다. 턱을 땅에 박으면서 일곱 번째 목뼈가 부러져 목과 어깨·등 근육 일부를 제외하곤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이 박사는 “그 뒤 느린 화면으로 비디오 테이프를 보는 것처럼 그 순간을 얼마나 많이 머릿속에서 되돌려봤는지 모른다”는 말로 당시의 충격을 전했다.

사고가 난 뒤 당장 몸을 추스르는 게 큰일이었다. 누운 상태에서 몸을 뒤집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는 움직일 수 있는 어깨와 등, 그리고 팔 근육의 힘을 기르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석 달 만에 휠체어를 몰고 병원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담당 의료진은 “이렇게 재활 속도가 빠른 환자는 처음 봤다”며 그의 의지에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장애인을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사가 되는 것은 잃어버렸던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되찾는 것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체조의 열정을 공부에 쏟기로 한 것이다. 재활훈련을 받으면서 미 대학입학능력시험(SAT)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공부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며 “그러나 설사 허리가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공부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SAT(학업적성시험) 1320점(1600점 만점)으로 뉴욕대에 입학했다. 그 뒤 컬럼비아대 보건대학원을 거쳐 다트머스 의대에 진학했다. 의대 실습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주사 놓기가 힘들자 호박에 작은 점을 찍어 바늘을 꽂는 연습까지 했다. 의대 동기생들은 억척스러운 그를 ‘수퍼 보이’라고 불렀다.

“정말 힘든 시기였다. 공부해야 할 전공서적을 다 쌓으면 휠체어 높이까지 올라왔다. 울기도 많이 했다.”

그는 대부분의 과목에서 A학점을 받고 수석으로 의대를 졸업했다. 이어 하버드 대학병원 인턴 과정을 마친 뒤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재활의학과 전문의가 됐다.

‘수퍼 보이’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 그는 편안한 전동 휠체어 대신 스스로 움직여야 하는 수동 휠체어만 탄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을 계속 단련하기 위해서다. 그는 “수동 휠체어를 모는 것은 게을러지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서”라며 “전동 휠체어에 편하게 앉아 버튼을 누르며 살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SKT 장애청소년 IT 챌린저대회’에서 상을 탄 한국의 장애학생 8명은 최근 존스 홉킨스대가 있는 미국 볼티모어를 방문했다가 수동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그를 보고 놀랐다. 당시 학생들을 인솔한 윤상준 SKT 사회공헌팀 매니저는 “이 교수가 힘든 수동 휠체어를 고집한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이 교수는 강의와 진찰로 바쁘게 산다. 손이 불편해 수술이나 물리치료를 직접 하지는 못하지만 환자의 눈높이에 맞는 진찰로 인기가 높다. 불의의 사고로 팔다리가 마비된 척추신경환자들은 그를 보고 삶의 의지를 되살리는 것은 물론이다. 이 교수는 “환자들이 같은 처지인 나에게 마음의 문을 빨리 연다”며 “장애는 나에게 오히려 축복”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스포츠와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는 미국 대표팀의 주치의를 맡았다. 그는 베이징 장애인 올림픽과 관련, “장애인에게는 운동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며 “더 많은 장애인이 참가할 수 있도록 올림픽 경기 종목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선택에 달렸다”며 “사지마비가 되더라도 용기와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요즘 휠체어 달리기 연습을 자주 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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