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월북작사가 조명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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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제(日帝)치하였던 1938년 가을의 어느날 서울 청진동의 한 요정에서 어떤 이름난 기생의 음독자살사건이 발생했다.이날 아침 그녀의 시체가 발견됐을 때 그녀 머리맡의 「유성기」에는 레코드가 얹혀 있었는데 태엽은 끊긴 채 바늘은 남 인수(南仁樹)의 『꼬집힌 풋사랑』위에 멎어 있었다.실연(失戀)자살임이 분명했다. 그보다 두어해 전 데뷔한 남인수는 그해 정월 「운다고옛사랑이 오리오마는/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으로 시작되는 『애수의 소야곡』을 불러 스타덤에 올랐고,불과 두달후 발표한 『꼬집힌 풋사랑』으로 이난영(李蘭影)과 함께 가요 계 정상의 쌍벽을 이뤘다.「발길로 차려무나 꼬집어 뜯어라/애당초 잘못 맺은 애당초 잘못 맺은/아,꼬집힌 풋사랑…」이란 가사의 이노래는 당시 여성들의 최대 애창곡이었던 것이다.
남인수를 정상에 오르게 한 두 곡 모두 엊그제 별세한 박시춘(朴是春)의 작곡이었고,『꼬집힌 풋사랑』의 작사자가 바로 조명암(趙鳴岩)이었다.조명암은 30년대초 시단(詩壇)에 데뷔,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발표해 한때 주목을 끌었으나 취 미삼아 작사한 『알뜰한 당신』『선창』『꿈꾸는 백마강』 등 가요들이 잇따라히트하자 해방후인 48년 월북하기까지 4백80여곡의 노랫말을 만든 당대 최대의 작사자였다.
해방 직후 문화계가 좌.우익으로 갈려 대립했을 때 조명암은 콤비작곡가 김해송(金海松)이 주도하던 우익 음악인들의 모임인 「대한대중음악협회」에 잠시 참여하기도 했다.그러던 그가 왜 자진 월북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월북후에는 문예총 부위원장까지 지내면서 시작(詩作)에만 전념하다가 최근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0년대 후반 그가 작사한 노래들은 다른 월북 작사.작곡가의노래들과 함께 「금지곡」으로 공식 지정됐으나 몇몇 히트곡들은 그 규제에서 빠질 수 있었다.작사자가 다른 이름으로 둔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좋게 보면 금지되는게 안타까워 이름만 바꿔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 되고,나쁘게 보면 임자없는 노래의 저작권자로 행세해 온 것이 된다.92년 모두 해금됨에 따라 조명암의딸은 저작권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냈다.주인을 찾아주는 것은 당연하지만,이 또한 분단의 조그마 한 비극 가운데 하나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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