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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엔 판사, 주말엔 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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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나무~ 묘법연화경~”

지난달 30일 오후 7시 충남 보령 무진사. 어둠이 내려앉는 고즈넉한 산사에 독경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오후 7시에 시작해 이튿날 오전 5시에 끝나는 10시간 철야기도가 막 시작된 것이다. 수백 쪽이나 되는 불교 경전 묘법연화경(법화경) 전체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하는 수행이다.

대웅전 불상 앞에 모여 앉은 30여 명의 신도와 5명의 승려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승복 차림이지만 삭발은 하지 않았다. 단발머리 차림으로 독경에 열중하는 그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5부의 이성은(30·여) 판사다. 법명이 여진(如盡)인 그는 이곳 절집에선 법사(法師)로 불린다. 승려로 출가하지 않은 재가불자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정진은 계속한다.

이성은 판사(左)가 무진사 승려들과 함께 10시간 동안 불경을 읽는 수행을 하고 있다.


이 판사가 무진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9년 사법시험 공부를 하려고 들어가면서부터. 불자인 어머니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이 판사는 절 한 쪽에 갖다 놓은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앉아 공부와 신앙생활을 병행했다. 책을 한 권 떼고 나면 3박4일 내내 탑 주위를 돌며 기도하는 ‘천탑’을 했다. 법회와 철야기도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이 판사는 절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사시 42회에 합격했다. 합격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그는 졸업까지 2년 동안 1주일에 이틀만 학교에 가도록 강의표를 짰다. 나머지 닷새는 절에 머무르기 위해서였다.

이 판사는 지금도 금요일 오후 재판이 끝나면 곧바로 보령으로 향한다. “피곤하지 않으냐는 분도 많지만 저는 보령행 버스에 몸을 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토요일 낮에는 도량을 정돈하고 찬불가 연습을 한다. 밤에는 철야기도, 일요일 아침엔 법회에 참석한다. 절에 기거하는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다 월요일 새벽 서울에 있는 법원으로 출근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수행을 하면서 어떤 변화가 왔는지 물었다.

“전에는 사람과 세상에 부정적인 생각이 많았어요.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건 틀렸는데’ 하는 식이죠. 그런데 불교에 귀의하고 난 다음에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세상 모든 일엔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혹시 불자에겐 너그러운 판결을 하는 게 아닌지도 궁금했다.

“부장님(3인 재판부의 부장판사를 지칭)도 계시고 하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죠. 있어서도 안 되고요. 소송 당사자의 종교가 드러나는 재판을 한 적도 없어요. 설사 스님이 포함된 재판을 하더라도 판사라면 냉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판사는 범불교도대회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견을 표출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원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비는 사랑과 슬픔이 조합된 말이죠. 부처님 앞에선 대통령이나 공직자나 다 불쌍히 여겨야 할 중생들이므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대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터뷰를 마친 이 판사는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해 인사한 뒤 독경 소리 낭랑한 불심의 세계로 돌아갔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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