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외교의겉과속>上.黨 국제부-모든 외교활동 원격조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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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한은 90년대 들어 소련의 해체와 급변한 국제정세와 심각한경제난,김일성의 사망까지 겹친 내우외환을 헤쳐나가기위해 사력을다하고 있다.그 주요 수단은 외교다.북한은 그들 특유의 외교술을 구사,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경수로와 중유공급을 거저 챙기고 국제사회으 식량원조를 유도해냈다.지금은 미국의 경제제재 완화나 북.미연락사무소 설치.대일수교등 굵직한 사안들도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김일성이 사라진뒤 북한이 생존차원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추진하는 외교전략.전술의 산실과 담당자들,물밑 실세들을 살펴본다.
김정일(金正日)에게 보고되는 모든 외교문건은 어떠한 경우에도「당 국제부와 협의했습니다」라는 말을 겉장에 적어야 한다.북한의 외교정책은 외교부와 당 국제부등 관련부처간의 사전조율을 거쳐 김정일의 최종결재로 확정된다.관련부처간 합의 가 이뤄지지 않은 정책은 아예 김정일에게 올라갈 수조차 없다.일단 김정일의결재가 나면 외교정책으로 확정된다.간혹 서류 겉장에 세부 지시사항을 직접 적어넣거나 고쳐 사인하는 경우도 있다.
협상에 나올 때도 이같은 과정을 거쳐 결정된 대안을 갖고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한번 결정된 정책에 대한 변경은 똑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다만 절대권자인 김정일의 결심이 있을 경우 물론 예외다.때문에 북한의 협상대표 들에게 주어진 재량권은 거의 없다.
북.미 1단계 고위급협상이 한창 진행중이던 지난 93년6월초뉴욕의 협상테이블에서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느닷없이 북한대표간에 고성이 오간 것이다.미국측 로버트 갈루치대표가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북한측 협상대표끼리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잠시후 북한측은 휴식을 요구했다.강석주(姜錫柱)북측대표가 커피잔을 든 채 갈루치대표에게 다가와 『저사람들이 강력히 반대해미국측 제안을 수용할 수 없다.나로선 정말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다.이해해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갈루치대표로서는 얘기가 거의 끝나가던 상황이었지만 원점으로 돌리는 외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북측 대표단은 협상이 본부의 지시와 다르게 돌아가자 국제관례를 완전히 무시한 쇼를 연출함으로써 옹색한 처지를 모면한 것이다.후에 갈루 치대표는 『북한측 대표들은 아무 권한도 없이 지침대로 행동할 뿐』이라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북한나름의 고도의 술책임을 모르는 소치다. 북한의 외교는 정부쪽의 외교부,당쪽의 국제부,외곽조직인조선대외문화연락위원회라는 삼두마차로 운영된다.외교부는 정부간 외교관계를 담당하고,당 국제부는 외교부가 입안한 정책을 검토하는 일외에도 외국의 사회당및 야당과의 교류,미수교 국 가와의 사전 외교교섭을 담당한다.대일관계에서 외교부보다 당 국제부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도 이 때문.조선대외문화연락위원회는 비정부간관계를 총괄하는 부서로 외국의 각종 친선단체및 주체사상과 관련된 해외단체들과의 교류가 주업무다.
무역등 대외경제정책은 정무원산하의 대외경제위원회 소관사항이고당 조직지도부도 당 생활지도과.검열과등의 기능을 통해 외교정책담당부서를 견제할 수 있다.여기에 인민무력부.국방위원회.당 군사위원회등 군부가 가세하고 남한의 안기부격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입김도 스며든다.하지만 북한외교의 주무부서는 역시 외교부다.
북한의 대외정책은 외교부나 대외경제위원회의 실무부서로부터 시작된다.이들 부서는 세부정책의 입안을 담당한다.해당부서내의 결재과정을 거친 정책은 부부장및 부장의 결재를 거쳐 당 국제부로넘어가 심의과정을 거쳐야 한다.입안된 정책들이 체제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인지 판정받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당 국제부는 외교부나 대외경제위원회가 입안한 정책을「틀어버릴 수 있는」거부권을 가진 셈이다.한때 당 국제부가 외교부의 정책입안과정에까지 개입하는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자 외교부가 이에 반발,마찰을 빚는 소동도 있었다.
91년 5월 사망한 허담(許錟)이 외교부장으로 있을 때는 일하기가 편했는데 김영남(金永南)이 외교부를 맡으면서부터 여기저기서 간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고참 외교관들의 푸념섞인 불만이 많다고 귀순한 전 북한외교관 현성일씨는 전하고 있다.허담은김정일과 사석에서 어깨를 툭툭 치면서 얘기하던 사이였다.허담의부인이자 현재 정부기관지 민주조선의 책임주필인 김정숙(金貞淑)을 김정일은 「고모」라고 부른다.북한의 권력이 자리 못지않게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외교부와 당 국제부의 갈등은 대개의 경우 부서장간의 절충을 통해 해결된다.외교부 부장 김영남은 당서열 7위의 정치국원으로국제부장.국제비서를 역임했던 거물이고,국제부장인 현준극(玄峻極)은 노동신문사의 요직을 두루 거친 국제통이지만 당서열 38위에 불과해 아무래도 당 국제부가 밀릴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워낙 당의 입김이 강한데다 국제부의 뒤에는 국제비서 황장엽(黃長燁)이란 주체사상의 대부가 버티고 있어 갈등이 심해지면 김정일이 직접 중재해야만 할 때도 있다.당 국제부가 외교부의 정책입안과정에까지 간섭해 마찰이 심화됐을 때 김정일이 직접 나서 국제부의 전횡을 막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했다는 얘기가있다. 당 국제부가 「심의필」한 정책들은 김정일의 최종결재를 거치게 된다.결재를 올리는 방법은 문서를 암호로 작성해 우리의비서실격인 서기실로 보내는 방법과 긴급문건의 경우 직통팩스로 보고하기도 한다.부장이 직접 문서를 들고 서기실로 올 라가 보고하는 일은 드물다.때문에 김정일에게 올리는 보고문건의 분류작업은 서기실장의 고유권한.자연히 서기실장의 영향력이 막강해진다. 우리의 국회격인 최고인민회의 산하에도 외교위원회가 있어 주요 외교관리에 대한 임명동의권과 정책심의기능을 갖지만 현재의 제9기 최고인민회의는 5년임기를 1년여 넘긴 처지로 소집조차 되지 않는 상태다.더구나 외교위원회의 핵심구성원들이 외교부와 국제부소속 인사들이어서 외교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기는 무리라는게 일반적 관측이다.
이밖에도 북한의 외교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관은 국가안전보위부.각국 공관에 「안전대표」를 파견해 정보수집업무와 외교관들의 감시업무를 담당한다.한때 본부와 각국 공관들과의 전문 수.발신업무를 담당하는 외교부 15국 기능을 넘겨달 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더구나 최근 예산부족으로 「안전대표」들이 파견되지 않은 공관도 많아 실질적 영향력은 제한돼 있는 실정이다.
김용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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