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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산마을>21.충북 단양 의풍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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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정감록(鄭鑑錄)은 60여가지에 달한다.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며 내용을 보태고 빼다 보니 이렇게 많아진 것이다.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그러나 중심 내용만큼은 똑같다.「살기 좋은 새 세상」을 바란다는 것이다.재해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못 살았던 옛 시절,새 세상에 대한 기대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단양(丹陽)지방은 「동록잡기(東錄雜記)」라는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다.승지는 살기 좋은 이상향을 말한다. 그러나 단양사람들은 단양땅에서 진정한 승지는 의풍리(충북단양군영춘면)라고 말한다.
의풍리의 지형을 찬찬히 살펴보면 승지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의풍리에서 태백산.소백산이 갈라지고 충북.강원.경북 3개도가나뉜다.요즘처럼 교통편이 좋은 시절에도 의풍리는 지프가 아니면들어가기 힘들다.천혜의 요새라는 말이 실감난다 .
그러나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려 막상 의풍리에 닿으면 넓은 분지로 이뤄진 마을모습이 편안하게 다가선다.의풍리는 산이 높고 아름다우며 땅이 걸어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단양사람들 말은 사실이었다.
산마을치고는 농사도 잘 된다.논농사도 하며 특히 대추와 고추가 잘된다.대추농사는 가구당 20~30가마를 수확할 정도다.
이런 외딴 승지마을에 방랑시인 「김삿갓」이 숨어 지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김삿갓은 이름이 병연(炳淵),호는 난고(蘭皐)였다.선천(宣川)부사였던 조부 익순(益淳)이 홍경래(洪景來)난 때 항복하는 바람에 폐족을 당했다.어머니 함평 李씨는 어린 병연을 데리고 경기도 광주.이천,강원도 평창을 거쳐 영월에 숨는 다.
병연은 20세 때 영월 도호부 동헌의 백일장에서 홍경래에게 항복한 조부를 꾸짖는 글로 장원급제를 한다.
그러나 뒤늦게 자신이 조부를 비난한 것을 알고 죄책감에 몸부림치다 가장 외진 곳인 의풍리에 터를 잡고 살았다.그러나 그것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삿갓을 쓰고 방랑하다 57세에 광주 무등산 근처에서 죽었다.
김삿갓의 묘와 비석이 있는 곳은 좀 특이하다.
개울을 하나 두고 단양군의풍리와 영월군와석리(노루목)로 나뉘는데 시비와 비석.제각은 단양땅에 있고 묘는 영월 쪽에 있다.
단양과 영월 모두 김삿갓이 자신들의 고장과 관련이 있다고 믿기때문이다.
그러나 시동호인과 문인들에게 김삿갓이 어디에서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양향토문화연구회 총무 김동식(42)씨는 『이곳에서 인근 문인들이 1년에 두번씩 삿갓제를 지내면서 시심(詩心)을 키우고 우의를 다진다』며 『이 때 많은 시동호인들도 참가한다』고 말했다. 의풍리를 찾는 길은 힘들다.단양과 영월 양쪽에서 포장공사를 하고 있지만 삿갓묘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직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지나야 한다.
마치 스스로 험한 길을 택했던 김삿갓의 인생여정을 다시 밟는듯하다. 김삿갓은 눈을 감을 때 『저 등잔불을 꺼 주시오』라고했다고 한다.시는 고통 속에서 나오나 보다.
글=하지윤.사진=임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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