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좌절 시대 다섯 청년의 희망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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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리포트는 8월 3일자에 ‘청년 좌절 시대’를 실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취업하기까지 평균 11개월이 걸리고 취업준비생이 60만 명에 이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대학생 실업난에 초점을 맞춘 기획이었지요. 이 보도 이후 열린 첫 기획회의에서 일선 취재기자들이 후속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대졸자보다 더 곤란을 겪고 있는 고졸자의 취직 문제를 다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다 알다시피 한국은 학벌·학력 ‘약발’이 잘 먹히는 사회입니다. 명문교 출신과 고학력자가 확실히 우대받는 구조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학력·학벌 프리미엄이 있지만 우리의 경우 그 정도가 심합니다. 고졸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회지요.대졸 실업난은 고졸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습니다. 인력시장에 고학력자가 넘쳐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괜찮은 고졸 일자리가 대졸자에게 넘어갑니다.학력 간 임금 격차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올 2분기 도시근로자가구 중 대졸 가구주의 월평균 소득은 346만원으로, 지난해에 비해 7% 늘어났습니다. 고졸 가구주의 소득은 같은 기간 216만원에서 223만원으로 3% 증가하는 데 그쳤습니다.

대졸과 고졸의 임금 격차는 5년 연속 확대되는 추세입니다. 실질적인 취업 실태를 보여주는 고용률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픽 참조> 우리 언론은 대졸 실업난을 크게 취급하면서 고졸의 좌절에는 눈을 감습니다. 더 이상 뉴스감이 아닐 정도로 흔한 스토리가 돼버린 탓이겠지요. 취재팀은 고졸의 희망을 찾고자 했습니다. 학벌·학력 사회에서도 작은 취업신화를 만든 다섯 명의 인생 행진을 취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역경과 방황이라는 공통DNA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끈질긴 노력과 꼼꼼한 취업준비로 이를 이겨냈습니다. 한 해에 60만 명의 고졸자가 쏟아집니다. 이들에게 스페셜리포트가 조촐한 희망가가 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정책 결정자들에게 잊고 있던 고졸 취업대책을 한 번쯤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이규연 미래·탐사보도팀장 letter@joongang.co.kr


스페셜 리포트는 최소한 3주일간 준비해 만드는, 중앙SUNDAY에서만 볼 수 있는 명품 기획기사입니다.

고장난 내 인생, 직업학교서 싹 수리했죠
①자부심- 자동차 정비사 황명구씨

헤어 왁스로 세운 머리 스타일,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자신감에 찬 웃음 띤 얼굴….경기도 일산에서 만난 ‘고졸 청년’ 황명구(26·사진)씨의 첫인상이다. 얼굴 아래로 기름때 묻은 하늘색 티셔츠는 한참 만에야 눈에 들어왔다. 그의 직업은 차량 부품 정비공. 직원 9명의 자동변속기 전문 수리업체인 ‘대성자동변속기’가 그의 일터다. 고교 동창들이 한창 대학 캠퍼스를 오갈 때인 23세에 입사했다. 올해로 경력 3년 차, 지난달엔 주임으로 승진했다.

‘고졸에 기름밥 신세’라고 자조할 수도 있으련만, 얼굴 어디에서도 그늘진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도리어 “지금이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다. 몸에서 묻어나는 기름 냄새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고장난 변속기가 들어오면 먼저 부품 하나하나를 분해한 뒤 초음파를 이용해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씻어냅니다. 부품을 갈아끼우고 조립해서 검사 기계에 돌려본 뒤 이상이 없으면 출고되는 거죠.”

그는 공장의 공정을 따라가며 자신이 하는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공장 한쪽 끝 선반에는 말끔하게 다시 태어난 변속기들이 가득 차 있다. “1억5000만원짜리 자동변속기 검사장비 ‘다이나모 테스트’를 제외하고는 직접 다 다룰 수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황씨의 월급은 160만원, 보너스까지 포함하면 연봉 2000만원을 조금 넘는다. 매년 조금씩 오르는 월급도 그에겐 희망이다. 수습사원 딱지를 뗀 첫해 100만원, 지난해 12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과장이 되면 300만원은 받을 수 있다”고 자랑했다. 지금까지 모은 돈은 약 1000만원. 그는 “내 꿈을 이룰 종자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강료 부담돼 학원 못다녀
황씨는 일산의 한 인문계 고교를 졸업했다. 고3 때 성적은 학급 40명 중 끝에서 5등, 4년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중3 때 전교 10등 안에도 들었던 모범생이었지만 고교에 와서 수학 수업을 못 따라가 성적이 급전직하했다.

수능시험이 가장 쉬웠다는 2000년 400점 만점에 320점을 받았다. 점수에 맞춰 전공을 고르고, 간신히 서울의 한 전문대에 합격했지만 흥미가 없었다. 입학 포기. 대신 서울역 부근에 있는 자동차전문학원을 골랐다. “자동차 정비사였던 아버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아버지 일터에서 공구를 가지고 재미있게 장난하던 기억이 나요.”

학원은 2년 과정이었지만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학원 생활 9개월 만에 군 입대 영장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씨의 아버지가 직장을 잃어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한 학기에 200만원인 수강료를 마련할 길도 어려워졌다.

해병대에 지원해 백령도에서 군복무를 했다. “제대가 가까워지니까 입대 영장을 받았던 때보다 마음이 더 막막하고 무거워지더군요.” 제대 뒤 할인마트 직원, 용접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앞길이 보이지 않던 황씨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학교인 ‘인력개발원’이었다. 2005년 3월 집 부근에 있는 경기인력개발원의 차량제어정비학과에 입학했다.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의 권유였다. 국비 지원이 돼 수업료가 공짜일 뿐만 아니라 매달 20만원의 ‘훈련수당’까지 나왔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봐왔던 덕분인지 차량 정비는 황씨의 적성에 맞았다. 1년 동안 자동차 정비기능사, 건설기계차체 정비기능사, 지게차 운전기능사, 굴삭기 운전기능사 4개의 자격증을 땄다. 기술이 있으니 일자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졌다. 졸업 3개월 전인 2005년 연말에 지금의 직장인 대성자동변속기에 취직했다. 당시 8명의 지원자가 있었지만 면접과 적성테스트를 거쳐 황씨 혼자 당당히 합격했다.

자격증 4개 따…연봉 2000만원 넘어
황씨는 27일 공장을 찾아온 취재진을 무척이나 반겼다. “당시 일기장에 적은 제 꿈이 뭔지 아세요? 최고의 자동차 정비사가 돼 신문에 나오는 것이었어요. 아직 최고의 정비사는 아니지만 꿈을 이룬 셈이네요.”

인생의 길을 찾은 황씨는 이제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우선 내년쯤 4년제 대학의 자동차학과에 들어갈 계획이다. 단순히 학력에 대한 갈증이 아니다. 일의 전문성을 높이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의 마지막 꿈은 한국 최고의 자동차 정비사가 된 뒤 학생들을 가르쳐 보는 것이다. 그는 요즘 고교 친구들의 ‘공적(公敵)’이 됐다.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들이 “엄마가 걸핏하면 ‘명구만큼만 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고 푸념하기 때문이다.

황씨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내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든다”며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능동적으로 찾아서 과감히 도전하고 후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내가 본 황명구 - 사장 김재근씨
자동차 정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입사 때부터 일을 배우겠다는 열의도 강하고, 배우는 속도도 매우 빠르다. 가장 큰 장점은 매사에 성실하고 생각이 아주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자동차 정비기술로 주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데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인력개발원에서 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땄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윗단계인 정비기사 자격증도 따기 위해 공부하는 모습이다. 황 주임의 학력은 고교 졸업이 전부지만 원한다면 대학에서 관련 학문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돕겠다. 자동차 정비기술은 평생직업이 될 수 있는 분야라고 격려해 주고 있다.

최준호 기자·최보윤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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