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그리스.로마고전 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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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계 각국의 독자들은 지금 그리스.로마 고전에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독서 선진국으로 통하는 미국.영국.프랑스 등에서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열기는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불릴 정도로 뜨겁다. 영국에서는 지난 몇 개월 사이 과거의 번역본을 새로운장정으로 꾸미거나 아예 새롭게 번역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펭귄북의 경우 「시인이 번역한 고전」이란 이름의 시리즈를 펴내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최근 버질.호라티우 스.호머의 시집 3권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1차로 선보였으며 다음 달부터 오비드.사포.세네카의 시집이 잇따라 독자들을 찾을 예정이다.호라티우스의 작품은 펭귄북의 명성에 힘입어 지난 3월에는 영국에서 발표된 지 무려 1천8백년만에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는 영광도 누렸다.옥스퍼드대학 출판부도 지난 93년 이래 그리스.로마 고전 1백권을 새롭게 번역,출판했다.미국도 예외가 아니다.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는 그리스.로마시대 고전 5백여권을 한달에 5 ~6권씩 재출간하고 새로운 번역판도 1년에 6권씩 펴낸다는 계획을 잡고 있다.이 대학 출판부에서 올해 펴낼 새 번역판에는 『오디세이』와 현존하는 그리스최고(最古)의 소설로 전해지는 샤리톤의 『칼리호』도 포함돼 있다. 프랑스의 아를레아라는 소규모 출판사는 바로 그리스.로마 고전 시리즈로 대성공을 거둬 출판계에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이시리즈는 얄팍한 부피로 주로 공항이나 역의 여행객들을 파고들며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출간되는 그리스.로마 고전의 특징은 유명 작가들이 번역한 것을 다시 출간하고 있다는 점이다.유명한 영국시인 알렉산더 포프가 번역한 『호머의 일리아드』와 T E 로렌스.E V 리우가 각각 번역한 『오디세이』등이 대 표적인 번역서들.펭귄 클래식으로 나온 이 책 중에서 『오디세이』는 무려 2백50만부나 팔려 펭귄북 시리즈 중에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됐다.또 지난 9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데릭 월코트도 영국의 로 열 셰익스피어단을 위해『오디세이』를 희곡으로 만들었다.
그러면 이런 책들의 독자는 누구일까.지난 몇년 동안 서구 각국 학교에서 고전강좌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의 배경으로 설명될 수 있다.미국과 영국의 경우 라틴고전은 이미 지난 60년대 말부터 필수과목에서 제외됐고 그리스 고전은 그보다 훨씬 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에는미국 학교에서 라틴강의를 듣는 학생이 2만명으로 집계되었다.그수치는 계속 늘어 지금은 미국에서만 고전강의를 듣는 중.고등학생이 한 학기에 6만명 정도로 전 해진다.영국도 수치에 있어서는 미국보다 뒤떨어지지만 고전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영국의 고전교사연합(JACT)에 따르면 라틴강좌를 개설한초등학교가 4백개에 이른다.
프랑스에서도 지난 92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인 자클린드 로밀리가 라틴어와 그리스어 강좌 수강률을 높이기 위한 단체를 구성했다.로밀리의 노력에 힘입어 70년대 중반에는 그리스.
로마 강의를 듣는 학생이 전무한 실정이었으나 지 금은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그녀가 쓴 『왜 그리스 강좌를 들어야 하는가』라는 책도 심각한 주제에 비해서는 상당히 많은 6만부 판매를 기록했다.이처럼 그리스.로마 고전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은 늘어났으나 그들의 어학 수준이 원어로 읽 을 만큼은 되지 않기 때문에 번역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런 학생들의 욕구만으로 지금과 같은 붐이 형성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인은 바로 이들 고전의 주제가 현대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호머.버질 등 서사시인과 소포클레스.유리피데스 등 비극작가의 작품 주제인 영웅의 의미와 역사의 우연성이 불확실성 시대를 사는 현대인 에게 길잡이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조금은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그때만 해도 모든 인간사는 자본.노동.인구 같은 비개인적인 동인에 의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으로 풀이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공산 주의의 붕괴.
유고 내전 등 「돌발적」인 사태를 목격하면서 그런 역사관은 깨어지고 말았다.더이상 역사에 준엄함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역사도 예기치 않게 지진을 일으키는 지각이나 다를 바 없다는 식이다.우연이 중요하고 일개 개인도 역사의 물줄기를 확 바꿔버릴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처럼 개인의 능력에 대한 환상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킬레스나 오디세우스 등의 경탄할만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는 그리스.로마 고전이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는 풀이다. 서구 각국의 경우 고전번역이 전통적으로 주로 문필가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어 독자들로서는 더이상 바랄게 없다.번역작품 같지 않은 아름다운 문장을 읽을 수 있다.현재 서구 각국의 출판관계자들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열기가 다음에는 영웅들의전기쪽으로 옮겨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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