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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청마, 영원히 펄럭이는 ‘그리움의 깃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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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유치환 지음
강승희 외 그림, 교보문고, 208쪽, 1만3000원

100년만의 무더위도 기세를 꺾고 제자리로 돌아가는가. 귀뚜라미 울음이 와락 그리움과 회한에 떨게 하며 새벽 이불자락을 끌어올리는 처서(處暑) 어름. 이제 비어가는 햇살 속에 만물은 여물어갈 것이다. 서늘한 바람결에 그리움도 익어가며 마침내 낙엽처럼 나부낄 것이다.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는 청마 유치환의 1행시 ‘낙엽’처럼. 추억을 쓸고 또 쓸고 가는 귀뚜라미 울음과 함께 그리움도 깊어갈 것이다.


세월이 가도 파도 치듯 출렁이는 어찌할 수 없는 우리네 그리움을 깃발로 내건 시인 청마의 시선집이 쓸쓸한 계절을 함께 가자 한다. 청마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인 거제시문화예술재단에서 펴낸 『깃발, 나부끼는 그리움』은 1000여 편의 청마 시 중 100편을 골라 현역 화가 37명이 그림을 그린 시화선집. 시에 눈 밝은 독자와 늘 함께하고 있는 정호승 시인이 엮어 의지적이고 관념적인 생명의 시인으로 배운 청마가 그리움과 사랑으로 친숙하게 다가온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집의 표지는 그림으로 꾸몄고 판형과 장정도 다양해 시집 자체가 예술품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유력 출판사에서 시인 선집을 같은 판형과 장정의 시리즈로 내기 시작하며 시집을 붕어빵 찍어내듯 해 안타까웠다. 이러한 때 원본 대조와 확정, 교열에 적잖은 흠은 있지만 ‘시는 보고 그림은 읽게’한 시화집으로 펴낸 그 기획 자체는 소중하게 다가온다.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창파에 씻긴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갈매기 울음에 수심(愁心)저 있나니”(‘향수(鄕愁)’ 중). 일제 하 일본과 만주 등 이향(異鄕)의 추운 가로수 밑과 설원을 헤매면서 돌아가고 팠던 청마의 고향, 그 남쪽 끝 바닷가에 고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가보았다. 거제도 구조라 해수욕장에서 수평선에서 아득히 반짝이는 물결을 보았다. 사춘기 시절 갈매기처럼 하얗게 하얗게 날아오르다 파도처럼 부서져 내리는 그리움의 포말을 보았다. 그리고 그리움의 절창 ‘깃발’을 보았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깃발’ 전문)

혹자는 이 시에서 ‘이념의 푯대’로서의 깃발을 읽는다. 맑고 곧은 실천적 정신, 인류 보편적 가치를 향한 이상과 이념으로 교과서적으로만 읽고 그치기엔 이 시의 울림, 인간적인 아우성이 너무 크다. 애달픈 마음의 그 소리 없는 아우성, 그리움의 손수건을 깃발처럼 흔들고 있지 않은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임은 뭍 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그리움’ 전문)에서와 같이 터져 나오는 그리움의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맑고 곧은 순정의 푯대에 매단 시가 ‘깃발’이다. 그리움이 한 시절 값싼 감상이 아니라 이념이 되게 해 시의 영원한 표상이 되게 한 시가 ‘깃발’이다. 그리움의 속내를 향해 나부끼는 깃발, 그게 삶의 깊이이고 시 아니던가.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중략)/지나새나 뭍으로 뭍으로만/향하는 그리운 마음에/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밀리어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백두대간 멧부리 방울이 튀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로 금세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다고 노래한 ‘울릉도’는 요즘 다시 문제로 떠오른 독도로 바꿔 읽어도 좋을 시. 대표작 ‘바위’에서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는 비정(非情)한 바위가 되겠다던 청마도 이 시에서는 지나새나 뭍을 향하는 그리움의 바위섬이 되고 있다.

정호승 시인은 청마의 시세계를 “영원히 펄럭이는 그리움의 깃발”로 보았다. 애련에 물들지 않겠다며 열사의 사막과 바위를 찾았지만 그 무기질들에도 되레 그리움으로 생명을 주었으며 청춘의 마지막 항구에서도 목숨의 깃대에 그리움의 손수건을 휘날린 시가 청마 시다. 이번 청마 시선집은 삼라만상을 살아 오르게 하는 아득한 그 그리움으로 이 쓸쓸한 계절을 함께 하자 한다.

이경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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