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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슈빌리 순진한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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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그루지야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왜 세계 2대 군사 강국인 러시아와 승산 없는 전쟁을 무모하게 시작했을까.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12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러시아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방이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으로 잘못 판단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는 11일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의 그루지야 공격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서방의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반응은 미지근한 수사에 그쳤다. 그렇게 믿었던 미국과 유럽 중 어느 나라도 선뜻 그루지야에 군사 지원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장미혁명(민주시민혁명)’으로 2004년 집권한 이후 줄곧 러시아와의 갈등을 무릅쓰면서 그루지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유럽연합(EU) 가입 등을 추진하는 등 친서방 노선을 걸어온 사카슈빌리로선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도 사정이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발목이 묶여 있는 데다 대선을 앞두고 있어 또 다른 전선을 펼칠 여유가 없었다. 미국은 오히려 이란이나 북한 핵 문제 해결에서 러시아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에너지 수요의 25%가량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도 그루지야를 위해 러시아에 총을 겨누기에는 무리였다. 또한 사카슈빌리가 집권했을 때만 해도 서방 세계는 그를 옛 소련권에 민주주의를 전파할 구세주로 생각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러시아에 대해 도발을 자주 하자, ‘통제 불능 인물’이란 인식이 생겼다. 결국 국제정치의 냉정함을 모르고, 무모한 도발을 한 사카슈빌리는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그루지야는 독립을 요구해 온 친러시아 성향의 남오세티야·압하지야 등 2개 자치공화국에 대한 지배권을 잃고, 사카슈빌리는 실각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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