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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거포럼>경기도 파주 합동연설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왁자지껄하고 소란한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지방도시 파주.얼핏보면 평화스러운 듯하지만 북한과 대치하고 있어 군부대도많고 긴장이 넘쳐흐르는 곳이다.필자는 3일 경기도에서 제일 낙후된 지역중 하나라는 이곳 합동연설회장을 찾았다 .한국에 온 지 15개월.아직도 알쏭달쏭하기만 한 이곳 정치 내막을 총선현장이라는 최전선에서 알아보고 싶었다.
합동연설회는 한 초등학교에서 열렸다.사람은 적은 편이 아닌데도 열기는 없다.드문 드문 서있는 사람들은 후보 연설은 뒷전이다.자신들끼리 얘기하거나 뒤편 노점상에서 파는 음식을 사먹으며어슬렁어슬렁 운동장 주위를 걸어다닌다.미국의 유 세와 비교하면마치 「몽고사막」같이 썰렁하다.
운동원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무척 재미있다.우리차가 합동연설회장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각 후보 운동원들이 일제히『안녕하세요.기호 ×번 입니다』를 소리치며 차 가는 길 양쪽에두줄로 늘어서 허리를 90도로 굽혔다.대부분이 여성 당원들로 번쩍거리는 한복을 입었다.미국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조직적인 세과시는 각 당의 후보가 연설할 때도 나타났다.자기당 후보가 연설하면 밀집대형을 만들어 번쩍거리는 옷과 원색의 어깨띠가 더 두드러지게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런 조직적 선거운동꾼들이 전 관중의 3분의1은 족 히 넘어보였다. 젊은이들이 거의 없는 점도 인상적이다.노인들이 특히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60세 이상이 대부분이다.농촌지역이라 노인이 많은 지역적 특성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젊은이들의 정치적인 무관심을 반영한다는 것이 한국인 동료의 설명이다.
연설회가 진행되는 방식은 편리하긴 했지만 매우 지루했다.연설시간을 20분으로 정해놓고 한 후보가 마치면 다른 후보가 또 연설을 한다.
출마한 후보들을 모처럼 힘들게 한자리에 모아놓고 그들의 주장을 병렬적으로 늘어놓기만 할 뿐 토론기회 한번 마련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대부분 연설의 내용은 거시적인 정부비판이나 옹호,또 미시적으로는 낙후된 지역경제개발에 관한 것이 반반씩 섞여 있다.지역경제개발에 관한 것들은 관광산업육성,군사특별구역 규제완화,심지어는 대학유치도 있다.
지역개발공약은 거의 비슷하다.각당의 다른 입장을 대표할만한 「국가보안법 폐지냐 유지냐」「대기업위주의 경제냐 중소기업위주의경제냐」등 논쟁거리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미국에는 낙태.이민.소수인종평등법,공공토지에 대한 권리,학교의 예배가 종교자유 침해냐의 문제,총기 소유등 각당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 확연히 구분되는 정책이 나오고 있다.
얼마전 한국교수들과 관료들을 만나 북한에 대한 식량원조계획,영광군의 원전건설문제,그리고 통합선거법 개정의 궁금증에 관해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예민한 사항은 선거가 끝난후에 얘기하자』였다.세상에….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때 가장 쟁점이 될 만한 내용을 얘기하지 않으려 하다니.정책대립이 없는 선거판이 안타까웠다.또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시민운동단체나 노조들이 특정정당이나 특정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수 없는 선거법이다.시민사회의 근간이 되 는 이들 단체가 건전한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없을 때 시민문화의 공백을 뚫고 매표등 전근대적인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다.이번 선거가 권력의 집중화가 너무 당연해져버릴 만큼 굳은 한국의 사회적 질서를 어떻게 바꿔놓을지,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이 나라에서 얼마만큼 시민의식이 성숙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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