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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연관 + 윤리론’사상 서양에도 큰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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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현대 철학에서 한국과 동양 철학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계철학대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대에서 3일 철학자들의 대담이 진행됐다. 왼쪽부터 엄정식,정화열, 조가경, 이광세, 정대현 교수. [사진=김정훈 인턴기자]

◇동양 철학에서 길을 찾다

▶엄정식=철학사를 보면 한 사상의 탄생은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받는다. 어떤 철학자가 무슨 철학을 하는지는 시대가 결정한다는 말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정통 서양 철학에서 시작해 동양적 세계를 재조명하고 있는 학자들이다.

▶조가경=젊은 시절부터 동양철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양인이 동양철학을 한다면 서양 학계가 그리 알아줄 것 같지 않았다. 서양 학계가 납득할 수 있는 언어로 동양철학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헤겔이 동양을 얼마나 경멸했나. ‘동양에는 철학이 없고, 이성의 태양은 서양에서 온다’고 했으니. 헤겔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현상학부터 공부해야 했다.

▶이광세=서양 철학자 중엔 “동양에서는 ‘개인’이란 사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양에도 엄연히 ‘도덕적 개인주의’가 전래부터 있었다. 맹자가 말했듯 스스로 학문을 닦고 자기 수행을 하는 것이 바로 도덕적 개인주의다.

▶정화열=나 역시 동양에 철학이 없다고 하는 서구 중심적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다. 많은 서양 철학자들이 존재(being)로서의 세계와 인간에 초점을 맞춰왔다. 하지만 동양 사상에서 사람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人間)’이란 한자말이 나타내는 의미를 보라. ‘인간’은 사람과 세계 사이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간-존재(inter-being)’라는 개념은 동양 철학에서 익숙하다.

▶엄정식=나나 정대현 교수나 한국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모두 서양철학을 배운 사람들이다. 나는 줄곧 ‘자아 개념’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는 서양 철학적 개념이다. 최근엔 동양 철학에서 자아의 문제를 재조명하고 있다. 동양적 관점에서 서양적 주제를 풀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관심을 갖는 것이 ‘공동체적 자아(communal self)’라는 개념이다.

▶정대현=나도 처음엔 철학의 명징성·명료성에 매료돼 분석철학·심리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정신(마음)과 신체(두뇌)의 현상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물리주의의 세계를 탐구했다. 그러나 물리주의는 최근 벽에 부딪혔다. 그렇다고 데카르트 식의 심신이원론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런 가운데 동양의 전통사상을 붙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 등 자연계와 무기체인 돌멩이까지도 철학적 시야에 두는 세계관은 서양 철학이 봉착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동양 철학과 방법론

▶엄정식=펑유란(馮友蘭·1894~1990)과 같은 이는 “동양은 모든 것을 가졌으나 방법론이 약하다”고 한탄한 바 있다. 서양 철학의 방법론으로 동양 사상을 철학적으로 재정립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이광세=서양 철학이 봉착한 문제의 해법 중 하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는 획일적 사상체계에 의문을 품는 다원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동양 사상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원래부터 필요 없었다. 동양사상에 획일성이 없기 때문이다. 니체의 서양 비판 작업 같은 방법론적 우회를 동양 철학은 거칠 필요가 없다. 동양과 서양의 방법론 문제를 강조하지만 ‘방법론’이란 문제틀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가경=철학에 엄밀한 방법론만 요구한다면 이는 인간을 배제한 과학이 된다. 방법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 그냥 지혜에 머물 뿐이다. 방법론이 통일되지 않고 논쟁이 지속된다는 것 자체가 철학이 과학 이상이란 것을 보여준다. 방법론이란 주관을 개입시키지 않고 대상을 대상으로서만 처리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인간이 그 대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철학적 대상에서 인간을 빼면 학문 자체가 죽는다.

▶정대현=방법론이 중요하다는 것은 절대주의 시대의 영향 탓이다. 이성만이 유일한 방법론으로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원주의 시대다. 관찰자의 인식 개념 체계 안에서 대상·경험이 분리될 수 없다. ‘간-존재(inter-being)’라는 개념이 그렇다. 존재의 방법이면서도 존재의 내용이다.

◇철학과 인간, 자연의 관계

▶엄정식=과학의 시대에 전통적인 철학의 기초개념이 많이 무너졌다. 칸트가 썼던 개념들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생명·죽음이란 개념을 새로 정립하지 않으면 철학은 농담에 불과한 시대가 됐다.

▶정화열=철학은 당대의 절박한 문제에 답해야 한다. 현대의 문제는 사람 사이에, 사람과 자연 사이에 통합적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단절로 환경 파괴의 문제가 발생한다. 동양 사상, 한국 철학의 가능성을 말하지만 이는 인간과 환경이 공존하던 시대의 사상이다. 한국의 자연 환경이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됐다면 이미 한국적 사상의 토대가 훼손된 것인지도 모른다.

▶조가경=동양 세계에서는 인간만의 도덕을 말하지 않았다.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것도 ‘덕’이다. 한국이 그간 민주화·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뤄내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철학은 더 먼길을 가야 한다. 한국에서 서양이 배울 만한 어떤 사상이 나오길 바란다. 과학기술이나 논리학과 같은 분야보다는 윤리학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적 자연관과 윤리론을 합친 사상이 세계사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광세=한국의 철학도가 서양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외국의 문화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의 문화 배경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 철학 전공자라도 동양 고전을 잘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현대 사회의 당면 문제에 어떤 타당성이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동양-서양’이라는 범주 개념도 시대착오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한국 철학의 세계화를 위하여

▶엄정식=한국 철학계에 하고 싶은 말을 듣고 싶다. 나의 ‘공동체적 자아’ 개념은 한국 현대사를 다시 이해해 보는 것이다. 분단으로 인해 ‘공동체적 자아’가 갈라진 상황이다. 이를 통일한다는 것은 철학적 개념의 통일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정화열=한국의 학자들에게 외국어, 특히 영어로 글 쓸 것을 권장한다. 그래야 한국에서 의미 있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다. 영어는 전세계 학자의 80%가 사용할 정도로 학문적 공용어가 됐다.

▶조가경=젊은 학자들이 동양의 고전을 많이 읽었으면 한다. 하지만 옛 문헌은 아무리 파 보아야 새로운 것이 얼마 나오지 않는다. 지금 인간 생활과 사회 속에서 고전의 개념이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를 짚으면서 읽어야 한다.

▶정대현=철학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할 수 없다. 철학적 문제의 공유를 통해 한국의 철학이 발전한다. 이번 철학대회는 다양한 분야에서 자라온 사상적 씨앗들이 서로의 토양에 뿌려지는 실험이다. 한국 전통 철학과 함석헌의 씨알사상 등이 다양한 사상 조류와 만나 세계적 철학으로 움틀 수 있기를 바란다.

정리=배노필 기자


“한국 ‘DMZ적 상황’이 내 철학 사고 주제될 것”
윤리학 대가 팀 스캔론

세계철학대회의 주요 초청 연사로 처음 내한한 팀 스캔론(68·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사진)은 현존 최고의 윤리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2001년 작고한 동료 교수 존 롤즈와 더불어 윤리학·정치철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대표작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하버드대 출판부, 1998년)에서 그는 도덕적 옳음과 그름을 일종의 계약론으로 설명한다. 상대방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간주하는 칸트주의적 계약론을 따르고 있다. 2일 판문점과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고 돌아온 그는 “DMZ적 상황이 내 철학적 사고의 한 주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신이 느낀 ‘DMZ적 상황’이란 무엇인가.

“우선 내 입장에서 도덕이란 ‘자신의 행위를 타인에게 정당화하고 싶은 욕구’다. 정당화의 욕구가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든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조화를 중시하기 때문에 도덕과 윤리가 생긴다. 여기에는 상대방이 어떤 원칙을 받아들일 만큼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가정이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도덕적 정당화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윤리적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 분단 현장을 직접 보니 도덕 철학자로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DMZ적 상황이 향후 당신 철학에 영향을 끼칠 것 같나.

“철학적 사고의 테마가 될 것 같다. DMZ적 상황은 분명 내 도덕적 이론에 도전을 던져 준다. 도덕이란 조화를 목표로 한다. 이상적으로는 상호 정당화이다. 그러나 DMZ적 상황은 이것과 다르다. 합리적 타협이 어려운 상대방이나 적에 대해 우리는 어떤 도덕적 의무를 져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윤리학은 소용이 없어진다.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윤리학이 필요하다.”

-윤리적 차선책은 무엇인가.

“최대한 상대의 합리성을 가정하고 그들이 받아들일 만한 원칙을 채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무조건 양보하란 것은 아니다. 그건 내 도덕적 입장이 약화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은 북한이라는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 하나의 행위자로 대상화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 속의 다양성을 발견해야 한다.”

-촛불시위로 극심한 교통체증도 겪었다고 들었다.

“DMZ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심 집회로 저녁 약속 시간에 상당히 늦었다. 나를 초청한 많은 사람을 기다리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기다린 것은 내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다.”

글=배노필 기자
사진=김정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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