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 칼럼] 대중화 세기의 개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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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영화 ‘적벽대전’을 제작한 우위썬(吳宇森)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약한 자들이 모여 강한 자를 제압하는 역사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그래서 우위썬은 삼국지의 앵글을 조조와 유비에서 주유와 제갈량으로 바꿔 적벽전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주유’로 분한 양차오웨이의 카리스마가 더욱 돋보일 속편에서는 우위썬 감독이 숨겨둔 코드, 이른바 ‘대중화의 개막’이라는 중국의 오기가 확연하게 느껴질 것이다. 서양을 만든 중대한 사건들은 중국사라는 거대 스케일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부지불식간에 인화되는 것이다.

고대국가 전투인 ‘트로이’, 유럽 영토를 넓힌 ‘알렉산더 대왕’, 스페인 무적함대, 나폴레옹 군대가 몰살된 ‘워털루 전투’ 등을 ‘적벽대전’이라는 웅장한 스토리의 한낱 에피소드로 활용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 영화들을 슬쩍 모사한 흔적이 많지만, ‘적벽대전’이 노리는 메시지에 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양의 중대 사건들을 다 모아도 중국사의 거대한 흐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 특히 ‘약자들의 대동(大同)’ 그 한복판에 ‘대중화’가 탄생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영화 ‘적벽대전’은 서양 연합함대와 한판 붙겠다는 거대 중국의 21세기 도전장이다. 바야흐로 ‘대중화의 세기’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코앞에 닥친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중국인의 열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베이징을 최첨단 시설로 분장하고, 정신무장을 통해 13억 인구를 올림픽 전사로 나서게 했다. 1990년대만 해도 연탄재가 나뒹굴고 누추한 가옥이 즐비했던 2급 도시 베이징은 중동의 야심작 두바이를 몇 개 포개도 모자랄 만큼 화려한 도시로 변했다. 이곳으로 세계의 모든 문명이 깃들게 하고, 이곳에서 새로운 ‘대중화 시대’를 부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경기장 이름이 새 둥지(鳥巢·냐오차오), 공식 마스코트는 중국 우주관의 5대 요소(물, 숲, 불, 땅, 하늘)를 상징하는 푸와(福娃)다. 냐오차오에 부시를 비롯한 90여개국 세계 정상이 찾아올 예정이다.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국빈들이 임석해 ‘대중화의 개막’을 알리는 예포 소리를 듣는다. 세계 최고의 노동력·구매력·생산력을 소유한 중국의 탄생을 공식화하는 21세기의 제배(祭拜), 서양의 주도권을 대중화로 귀소(歸巢)시킨다는 문명사적 ‘적벽대전’의 팡파르에 세계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72년 닉슨 대통령이 마오 주석을 방문했을 때는 ‘죽의 장막’을 한 겹 벗겨낸다는 심정이었다. 76년 덩샤오핑이 개방을 선언했을 때 서양은 자본주의의 화력을 강화할 괜찮은 파트너 정도로 여겼다. 당시에는 일본의 정교한 문화에 매료되어 중국의 잠재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30년, 샤오캉(小康·먹고사는 문제)을 넘어 ‘약자들의 제국’으로 행군하는 중국을 누구도 막지 못한다. 열강 침략의 고난과 문화혁명의 후유증을 깊이 앓았던 중국은 아시아·아프리카 빈국들에 마음을 열어준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티베트 탄압, 소수민족 문제, 사회주의적 통치 등의 내부 쟁점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이 넘는 빈국 수반들이 냐오차오로 몰려드는 것에는 ‘약소국의 친구’라는 중국의 국제적 행보 때문이다.

더욱 거세진 자본주의 물결에 노출된 약소국들엔 중국이 뿜어내는 ‘상상력의 힘’과 ‘규모의 문화’가 커다란 위안이 될 터다. ‘항우가 산을 뽑고(力拔山)’, ‘우공이 산을 옮기고(愚公移山)’, ‘하루 9만리를 나는 대붕(大鵬)’….

빈국들은 이런 초월적 상상력에서 의욕을 다지고, 그것이 만리장성·천안문·자금성처럼 거대한 역사(役事)로 실체화된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확인한다. 일본 혼과 동양적 창조를 앞세웠던 일본의 이기적 매혹이 서양의 벽을 넘지 못하고 소멸된 자리에 침탈과 내전, 궁핍과 성장의 영욕을 ‘상상력과 규모의 문화’로 채색한 중국이 대중화를 선언하는 ‘적벽대전’ 또는 비장한 축제가 곧 베이징 올림픽의 문명사적 의미일 것이다.

중국과 일본 틈에서 풍전등화처럼 살아온 한국은 저 엄청난 괴력으로 일어서는 중국의 새 둥지(鳥巢)에 한 마리 소조(小鳥)처럼 깃들 것인가, 아니면 오늘, 중국 가는 길에 잠시 방한하는 미국 대통령의 그늘에 숨어 대중화의 거센 폭풍을 헤쳐나갈 것인가? 적벽에 운집한 조조의 100만 군사의 허(虛)를 탐지할 한국의 제갈량들은 지금 분주하게 움직이고는 있는가?

송호근 서울대·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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