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세카드 왜 나왔나 … 경기 죽 쑤는데 세금은 잘 걷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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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김모(37)씨는 요즘 신용카드를 부쩍 많이 쓴다. 야근을 마친 뒤 서울 도심의 회사에서 경기도 안양의 집까지 갈 때도 꼭 카드택시를 탄다. 승용차 기름값과 식사비는 물론 담배 값까지 카드로 결제한다. 지갑 속 현금은 5만원을 넘지 않는다. 식료품 등의 생활비나 자녀 교육비도 대개 카드로 지불한다. 고물가와 불경기로 팍팍해진 살림살이를 김씨 가계가 버텨내는 방법이다. 김씨처럼 월급이나 목돈이 들어올 때까지 결제를 미루며 카드로 생활비를 감당하는 봉급생활자·자영업자들이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불경기에도 신용카드 사용액은 빠르게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신용카드 사용액은 올 1분기에 86조원으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18.3% 늘었다. 봉급생활자들이 카드를 더 많이 쓰는 또 다른 이유는 연말정산 때 받는 소득공제 혜택 때문이다. 총 급여액의 20% 넘게 신용카드를 쓰면 초과분의 20%만큼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 한 푼이라도 더 소득공제를 받기 위해 1만원이 안 되는 소액결제에도 카드를 쓰는 게 일상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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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카드를 많이 쓰면 자영업자들의 세원을 노출시켜 세수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경기가 나쁜데도 세금은 잘 걷히는 ‘불경기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3일 “현금이 부족해 카드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세원 노출이 늘었다”며 “이 덕분에 세금이 생각보다 잘 걷히는 만큼 감세로 서민과 중산층의 부담을 덜어주는 게 맞다”고 말했다. ‘불경기→카드사용 증가→세원 노출→세수 증가’의 순환 고리가 바로 정부와 여당이 대대적인 감세에 나설 수 있는 ‘비결’인 셈이다.

정부는 지난해 초과 세수 가운데 절반가량(약 7조원)이 신용카드·현금영수증 사용 증가, 과표 현실화 등의 세원 투명성 강화로 더 걷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세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결과인 만큼 앞으로도 세수가 늘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올해도 8조원 정도의 초과세수가 예상된다. 하지만 이 돈의 쓰임새는 이미 정해져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유류세·할당관세·법인세 인하 등 올해 감세와 유가 환급 규모가 이미 5조8000억원에 달한다”며 “올해 추가 감세 여력이 크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년 이후엔 감세도 늘어날 전망이다. 계속 세금이 더 걷히면 감세도 늘린다는 게 정부와 여당의 복안이기 때문이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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