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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강1만리>36.제2부 호북.호남성-長沙 악록書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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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천백년 楚지방 인재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고 (千百年楚材導源于此) 근세 호남의 학문전통 태양처럼 눈부시도다 (近世紀湘學與日爭光) --우우(虞愚.1909~1989)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천년 세월을 간직한 문화유적이나 출토품을 흔히 만나게 된다.그러나 그 천년 세월이 오늘에 살아 숨쉬고 그 기능이 그대로 오늘에 이어지는 경우를 보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호남성 장사시(長沙市) 서쪽 악록산(嶽麓山)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악록서원(嶽麓書院)은 백록동서원.숭양서원.수양서원과 함께근대이전의 중국 4대서원 가운데 하나다.
이중 1천년 역사를 지니면서 변함없이 강학(講學).장서(藏書).제사(祭祀)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악록서원은 그야말로 「천년학부(千年學府)」로서 손색이 없다.학문의 전통뿐만 아니라 건축양식 면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상태도 완정해 1988년1월 중국 국무원은 「전국 중점문물 보호단위」(한국의 국보급에 해당)로 지정했다.
기록에 의하면 악록서원은 북송(北宋) 태조 개보9년(976)당시의 담주태수 주동(朱洞)이 강당 5칸.재사(齋舍)5칸 규모로 창설했다.그러다 진종(眞宗)때 크게 확장하면서 친히 「악록서원」이란 친필 현판을 하사하자 세상에 그 이름 이 본격적으로알려졌다.남송(南宋) 효종 건도(乾道) 연간에는 재사가 1백칸으로 늘고 장식.주희(朱熹)가 이곳에서 강학을 하자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 들어 그 수가 1천명에 달했다.
명나라 때는 왕양명(王陽明).고세태(高世泰)등이 이곳에서 양명학을 전파했고 청나라 때는 강희.건륭황제가 각각 「학달성천(學達性天)」「도남정맥(道南正脈)」등 친필 현판을 하사해 그 성가가 더욱 높아졌다.
그러다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교육제도 개편에 따라 「호남고등학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이어 호남우급사범(湖南優級師範).호남고등공업학당이 잇따라 개교했다.민국15년(1926)에는 정식으로 호남대학이 악록서원에 개설됐다.
***악 록서원은 일찍부터 「인재를 양성해 도를 전하고 민중을 구제한다(成就人材 以傳道而 濟斯民也)」는 것을 교육지표로 삼아왔고 유가경전을 기본교재로 삼되 엄격한 도덕수양을 추구했다.개방적이면서도 경세치용의 학문을 중시했고,특히 애국주의 전 통을 고수했다.예컨대 남송때는 「항금애국(抗金愛國)」이 선비들의 학문목표였는데 이를 주도한 것이 바로 악록서원이었다.산장(山長=서원의 우두머리)을 지낸 장식 부자가 효종에게 국토회복을위해 북벌을 강력히 건의한 것이 바로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이후 원나라 시기 악록서원 출신의 항원사적(抗元事迹)이나 명대 오도행(吳道行).왕부지(王夫之)등의 항청투쟁(抗淸鬪爭)에 이어 위원(魏源).증국번(曾國藩).곽숭도(郭嵩燾).이원도(李元度)등이 그 정신을 계승했다.청대 광서 초년 서원 안에 선산사(船山祠)를 건립해 항청의 기세를 돋웠고 뒤이어 선산학사에서 모택동(毛澤東)이 혁명사상을 연구했던 일등이 모두 악록서원 애국주의 전통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악록서원 산장을 27년동안이나 역임한 구양후균(歐陽厚均) 밑에서는 3천여명의 제자가 배출됐다.양강(兩江).직예(直隷)총독을 지낸 증국번,청말 양무파(洋務派)의 지도자로 군기대신을 지낸 좌종당(左宗棠),초대 주영대사를 지낸 곽 숭도 등이 그들이다.
또 영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호남제일사범에서 모택동을 가르친양창제(楊昌濟),손문(孫文)과 함께 동맹회를 조직했고 1911년 10월 무창기의(武昌起義)때 전시총사령관과 임시정부에서 육군총장을 역임한 황흥(黃興),원세개(袁世凱)의 제위(帝位)복귀를 막기 위해 호국군(護國軍)을 조직했던 채악(蔡鍔),저명한 언어학자인 양수달(楊樹達)등도 또한 악록서원 출신이다.이들의 명성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장사시의 거리이름에는 황흥로.채악로 등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비공식통계에 의하면 악록서원 출신 가운데 정사(正史)에 전기가 수록된 사람이 26명에 이른다고 한다.특히 근.현대사 형성과정에서 호남출신 인사의 업적이나 공헌은 타지역 출신에 비해 두드러진다.
***탐 사팀은 악양에서 악양루.동정호.군산을 거쳐 멱라에서굴원을 취재하고 장사로 오는 길에 판창에 들러 모택동의 첫째 부인 양개혜가 살던 집과 묘소를 찾은바 있다.양개혜는 바로 모택동의 호남사범 시절 스승이던 양창제의 딸이다.호남인맥의 한 줄기를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또 모택동의 생가가 있는소산 근처에는 유소기(劉少奇)의 고거가 있어 이 또한 호남인맥의 밑바탕에 흐르는 지역적 특성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탐사팀의 중국측 학자였던 채진초(蔡鎭楚)호남사범대교수는 장강이남의 「강호제현」에서 「호」가 바로 호남명사를 뜻한다며 인걸을 지령(地靈)과 관련,이렇게 덧붙였다.
『중국 지도를 보면 호남성의 모습이 마치 사람의 얼굴과 같다(지도참조).머리에서부터 눈.코.귀가 확연히 드러나고 그 머리부분에 장사가 있다.아마 이런 인연이 인물의 보고(寶庫)가 된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악록서원은 곧 「호남의 뇌」에 해당하는 셈이다.
청나라 건륭47년(1782) 악록서원 산장으로 취임한 나전(羅典)은 서원 주변에 연못을 파고 꽃밭을 가꿔 이른바 「서원팔경」을 조성했다.지금도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이를 두고 시를 읊고 글을 남기고 있다.또 서원에서 악록산 골짜기로 약30분 오솔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애만정(愛晩亭)이 있다.이 정자는 만당(晩唐)때 시인 두목(杜牧.803~853)의 『산행(山行)』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저만치 가을 산 돌길 따라 오르는데/흰 구름 피어오르는 곳에 사람사는 집이 있네/가마를 멈추고 잠시 늦가을 단풍 숲을 즐기는데/서리맞은 나뭇잎이 2월에 피는 꽃보다도 붉구나(遠上寒山石徑斜 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 )」.
악록서원의 천년 역사와 함께 산중에 정자 하나를 짓고 1천년전 선인의 시구에서 그 이름을 따오는 중국인의 생활정취는 짐짓부러운 멋을 느끼게 한다.
□다음회는『경극의 전신,한극』편입니다.
글=이병한(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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