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2·28 무장투쟁 주도 … 은행원 월급 200배 현상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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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 34면

1962년께 베이징에서 은거 생활을 하던 셰쉐훙(오른쪽)과 양커황이 중산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두 사람은 당시 실질적인 부부 사이였다. 김명호 제공

1928년 4월 15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 사진관 2층에서 대만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참가자 9명 중 7명이 대만인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중공 대표와 조선인 여운형이었다. 이들은 7개월 전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셰쉐훙을 회의 주석으로 추대했다. 5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며 대만에 거주하는 3명의 당원을 중앙위원에 포함시켰다. 회의에는 불참했지만 대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포석이었다. 사흘 후 열린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린무순(林木順)을 서기장에 선출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대만 여성 혁명가 謝雪紅<下>

대만공산당은 성립과 동시에 된서리를 맞았다. 1927년 조선공산당 사건이 발생하자 ‘상하이독서회’는 조선 동포의 반항정신을 성원하는 전단을 살포한 적이 있었다. 수명의 대만 청년이 ‘3·1절 기념회’에 참가해 조선과 대만의 독립 관철을 역설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영사관 경찰은 한 대만 학생의 집을 급습했다. 공교롭게도 셰쉐훙과 린무순이 동거하는 집이었다. 몸이 날랜 린은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영사관은 셰쉐훙을 대만으로 압송했다. 일본 경찰은 대만공산당과 셰쉐훙의 관계를 몰랐다. 두 달 만에 풀어줬다.

독서회 사건은 대만공산당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대만에 돌아와 당원 확충을 하려던 린무순은 행방이 묘연했고, 상하이에 남아 있던 남자 당원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대만에 있던 당원들은 대만공산당이 발각된 줄 알고 대만을 떠나 상하이로 피신했다.

셰쉐훙은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은 대만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 첫 번째 작업으로 타이베이에 국제서국(國際書局)을 설립해 좌익 성향이 강한 신문과 잡지·서적 등을 판매하며 거점을 확보했다. 양커페이(楊克培)라는 일본대학 정치과 졸업생이 동업자였다. 양은 린무순과 헤어진 후 혼자 지내던 셰쉐훙을 좋아했다. 그러나 정작 셰의 마음을 끈 사람은 양의 동생 양커황(楊克煌)이었다. 타이중(臺中)상고를 졸업한 국제서국 점원이었다. 셰쉐홍보다 일곱 살 연하였다.

셰는 농민조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한편 대만문화협회 회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대만공산당 조직과 농민운동을 결합하는 한편 기관지를 발행해 언론 자유를 주장하며 농민들을 대상으로 사상훈련을 전개했다.

1931년 봄 사창가를 순찰하던 한 경찰관이 수상쩍은 인물을 발견했다. 연행하려 하자 완강히 저항하며 ‘대만공산당 만세’를 외쳐댔다. 대만공산당의 존재를 파악한 일본 경찰은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3년간 검거 선풍이 불었다. 셰쉐훙은 13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먼저 출옥한 양커황의 결혼 소식을 듣고 전향서를 제출했다. 옥중에서 폐병을 얻었다. 소생 가망이 없자 9년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양커황은 처가가 부자였다. 타이중 기차역 건너편에 장인이 차려준 삼미당(三美堂)이라는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양은 셰쉐훙을 피하려 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 회복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5년간 삼미당을 함께 운영했다. 단정한 복장을 하고 문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의 생애 중 가장 편안한 나날이었다.

일본이 투항하자 국민당군이 진주했다. 다시 전면에 나선 셰쉐훙은 조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담배 팔던 노파를 국민당 군인이 폭행하는 사건을 계기로 2·28 사건이 폭발했다. 타이중에서 거행된 인민대회는 셰를 주석으로 추대했다. 셰쉐훙은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대륙에서 병력을 파견하자 대만은 피와 공포의 섬으로 변했다. 도처에 셰와 양의 사진이 나붙었다. 현상금 20만원. 은행원 한 달 급료가 1000원 미만일 때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가오슝(高雄)에 정박해 있던 해군 함정의 장교를 매수해 유유히 대만을 빠져나왔다.

대륙 생활도 평탄하지 못했다. 1952년부터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1968년 5월 홍위병들이 가슴을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폐병이 도졌다. 2년 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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