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남측 잘못이라면 왜 진상조사 거부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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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아무리 대한민국 체제와 다르다 해도 이 정도로 막무가내인 줄은 몰랐다. 금강산을 찾은 남측 여자 관광객 박왕자씨를 사살하고서도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말이다. 북한은 유감을 표명하기는 했으나 이번 사건의 책임을 전적으로 남측에 전가했다. 사과 및 재발방지책도 요구했다. 한마디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인 것이다.

초기부터 의문투성이였던 이번 사건은 시간이 갈수록 그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북측의 해명과 현장에 있었던 남측 목격자의 진술이 다르다. 박씨가 두 발의 총알을 맞았기 때문에 북측 해명대로 공포탄을 쐈다면 더 많은 총성이 울렸어야 했다. 그러나 목격자는 두 발의 총소리만 들었다고 말했다. 유족도 기력이 좋지 않았던 박씨가 당일 호텔에서부터 피살지점까지의 동선 3.3km를 북측 설명대로 20여 분 내에 주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남북 합동으로 진상조사를 해서 잘잘못을 가릴 수밖에 없는 복잡미묘한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진상조사의 필요가 없고, 모든 것은 남측 책임’이라고 나오니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이유야 어찌 됐든 박씨가 통제선을 넘은 것은 문제였다. 그러나 문명국가라면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출입 규정을 위배했다고 비무장의 중년 여자에게 다짜고짜 총을 쏘는 것은 문명국가임을 포기한 처사다. 북한이 진상조사를 거부하는 데에는 이런 측면이 반영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북한이 계속 진상조사를 거부한다면 남측 국민들로부터는 물론 국제사회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언제까지 억지와 비상식의 세계에 머물고 있을 것인지 안타깝다.

북한은 그동안 대북정책을 둘러싼 남·남 갈등을 잘 활용해 왔다. 남측을 우습게 알고 안하무인식 태도를 보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선 사정이 달라졌다. 북한 체제를 가급적 이해하려고 했던 계층조차도 진상조사를 한결같이 요구하고 있다. 일부에선 사과와 재발방지책도 요구하고 있다. 남·남 갈등이 생길 여지가 없는 사안인 것이다. 평양 지도부는 이 점을 잘 헤아려야 한다. 북한은 입만 열면 ‘민족공조’를 외쳐왔다. 그렇다면 동족의 비극에 이렇게 무심하게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상조사에 응하는 것만이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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