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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을 돌려다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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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닷새 후면 제헌절이다. 하지만 올해부터 제헌절을 달력에서 찾으면 더 이상 붉은색이 아니다. 제헌절이 여전히 국경일이긴 하지만 더 이상 법정공휴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제헌절을 쉴 수 없게 돼 안타까워 하는 말이 아니다. 건국 60주년을 표방하는 나라의 달력에서 공교롭게도 바로 올해부터 헌법 제정일, 즉 제헌절이 달력의 숫자 색깔만큼이나 퇴색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제헌절이 여전히 삼일절·광복절·한글날·개천절과 더불어 5대 국경일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법정공휴일에서 빠지며 사실상 국민들이 체감하기에는 한 급 낮아진 국경일이 된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나라가 여전히 표류하고 있는 근원적인 이유와 맥이 닿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 제헌절의 달력 숫자 색깔이 바뀌게 된 배경은 2005년 6월 이해찬 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2008년부터 제헌절을 법정공휴일에서 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쉬는 날이 너무 많다는 경제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법정공휴일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지만, 왜 하필 제헌절을 뺐을까? 물론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그놈의 헌법’이라고까지 거침없이 말했던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헌법 경시’ 풍조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해묵은 회의가 그 기저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 결국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되는 올해부터 공교롭게도 대한민국 탄생의 기초가 되는 헌법 제정일, 즉 제헌절은 찬밥 신세가 된 셈이다. 혹자는 법정공휴일만 아니지 여전히 국경일이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단지 국경일인 것과 법정공휴일인 것 사이에는 엄연히 국민들이 느끼는 정서적 온도 차가 있다. 한마디로 체감이 다른 것이다. 왜 국경일을 만들고 또다시 법정공휴일을 지정하는가. 국민들의 생활 속에서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그날을 각인시키는 효과가 단지 국경일인 때와 그것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을 때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 아마도 이렇게 몇 해를 가면 제헌절은 국민들의 뇌리에서도 퇴색해 버리고 말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이 법정공휴일이면서 나라의 초석인 헌법이 탄생한 날이 법정공휴일이 아닌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정녕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의 의미를 되짚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나라를 만들려면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결코 제헌절 하루 더 놀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려면 그 초석이 된 헌법의 탄생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온 국민이 소중하게 생각하며 생활 속에서 잊지 않게 해야 한다. 최소한 일년에 하루라도 오늘이 헌법의 탄생일이고, 이날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려면 제헌절은 법정공휴일로 환원돼야 마땅하다.

# 가뜩이나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라의 기본은 두말할 필요없이 헌법에서 나온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60년 역사는 그 헌법의 수난사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탄생한 순간까지 우리의 생활과 기억에서 거세될 지경에 이르렀다. 더 이상 제헌절을 이렇게 방치해선 안 된다. 지난 2월 25일 제헌국회의원인 김인식(金仁湜)옹이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로써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을 만든 제헌의원은 이제 단 한 사람도 생존해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헌법은 살아있다. 이제 헌법을 탄생시킨 제헌절은 우리의 기본을 다시 생각하는 날로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기본으로부터 새로 태어나야 한다. 제헌절을 국경일이자 법정공휴일로 명실상부하게 되찾는 것은 그 첫걸음이자 첫 단추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