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배명복 시시각각

강자가 내미는 아량의 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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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북 정상은 빈번히 만나는 것이 좋다. 북한이 핵을 폐기하는 데 도움이 되고 화해와 통일로 이끄는 것이 가능한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만날 준비가 돼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씀입니다.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 참석에 앞서 일본 교도통신, 영국 BBC와 가진 합동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이 기사를 보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뻔한데 왜 굳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의아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은 바로 다음날 격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이 총대를 멨습니다.

“온 민족과 전 세계가 지지하고 환영한 수뇌회담과 선언을 전면 부정, 전면 무시한 그가 수뇌회담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정권이 바뀌었다고 북남선언을 뒤집는 것은 초보적인 도덕도 없는 무례한 행위고, 온 민족의 지향에 대한 난폭한 유린으로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으며 그러한 상대와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조평통 대변인은 이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안을 남북관계 악화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술책으로 규정하면서 “수뇌회담을 말하기 전에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대한 입장부터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못박았습니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인정하고 수용하기 전에는 정상회담은 말도 꺼내지 말라는 엄포였습니다.

6·15 공동선언(2000년)의 서명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입니다. 10·4 선언(2007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의 서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분단 이후 남북 정상의 공동서명이 들어가 있는 문건은 이 둘뿐입니다. ‘경애하는 장군님’의 친필 사인이 들어가 있는 성스러운 문건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무시하는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경(不敬)’이라는 것이 북한의 입장인 것 같습니다.

역시 북한입니다. 하지만 수령 독재체제 탓만 하기에는 북한의 논리에 타당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딜레마가 있습니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은 자연인 김대중·노무현과 자연인 김정일 간의 합의가 아닙니다. 특수관계에 있는 남북한 두 체제를 대표해 그들이 서명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정상 간 합의를 없었던 것으로 한다면 정상회담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언제 휴지조각이 될지 모르는 합의는 뭐하러 하며, 대화는 뭐하러 하겠습니까.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는 분명 문제가 있는 조항도 있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를 선택한 유권자의 뜻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기존의 남북 정상 간 합의를 존중한다는 원칙 아래 대화를 통해 바꿀 것은 바꾸고, 보완할 것은 보완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봅니다.

마침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 등 기존의 남북 간 합의에 대한 존중 의사를 표명해야 한다는 의사를 이 대통령에게 전달했습니다. 비공개 특사 회담을 통해 기존 합의사항의 이행 방안을 협의할 것도 건의했습니다. 흘려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량은 강자의 특권입니다. 약자가 내미는 손은 굴욕의 상징일 수 있지만 강자가 내미는 손은 관용의 상징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대범함을 보여주십시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존중하고 계승·보완·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십시오. 그것도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흘릴 것이 아니라 대북 담화를 통해 당당하게 밝히십시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진정성에서 나옵니다.

새 정부가 이전 정부의 대외적 합의를 무시하면 국가적 신뢰도는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제관계의 상식입니다. 남북관계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민심의 변화를 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맞지만 정권 교체 때문에 국가의 신뢰도에 금이 가서는 곤란합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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