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시장의 신뢰가 위기 극복의 첩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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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부의 무모한 도전에 시장의 응징이 시작되는 양상이다. 코스피지수는 연중 최저로 내려앉았다. 국가적인 펀드 붐에 올라탔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쪽박을 차게 생겼다. 인플레이션 우려로 시중 금리는 슬금슬금 올라 부담스러운 수준이 됐다. 주택담보 대출을 받은 가계들은 가중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외국인들은 가차 없이 서울 증시를 떠나고, 들어와야 할 외국인 직접투자는 발길을 돌리고 있다. 시장 혼란과 경제 위기의 공포감이 피부로 다가오고, 국민의 고통지수는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이번 경제불안은 간단히 넘어갈 사안이다. 블랙 먼데이나 9·11테러는 돌발적인 외부 변수였다. 이번에는 미국 주택경기가 다시 살아나거나 세계 석유소비가 극적으로 감소하지 않는 한 쉽게 풀릴 가망성이 없다. 증시가 계속 곤두박질하면 일시에 펀드를 대량 환매하는 펀드 런이 닥칠지 모른다. 금리가 치솟아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외부의 해일이 거칠수록 내부 단속이 중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시장주의자라고 했다. 하반기에는 물가와 민생 안정에 주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려면 불안한 경제심리부터 다독이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다. 시장은 팽개치고 시장에서 버림받은 기존 경제팀만 끌어안았다. 대통령의 경제인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제3의 오일쇼크’라 해도 진정성을 믿기 힘들다.

지금은 어느 나라라도 안심할 수 없다. 경제주체들에게 고통분담을 강요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해야 한다. 물가동결·임금억제 등의 비상카드를 꺼내야 할지 모른다. 이럴 때 정부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시장이 외면하면 대책이 없다. 정부는 2단계 고유가 위기관리 대책을 발표하고, 경제정책조정회의를 ‘위기관리대책회의’로 바꾸었다. 그러나 정부의 위기의식이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다. 위기의식 없이 위기를 이겨낼 수 없다. 정부는 시장의 신뢰를 얻는 길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시장에 맞서 이기는 정부는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