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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한 반기문 총장을 보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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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기자 시절 엉뚱한 취재 아이디어를 하나 낸 적이 있다. 출퇴근시 가장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하는 고위 공직자는 누구인가? 세종로 정부 청사의 경비직들을 대상으로 약식 여론조사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고위 공직자들의 하급자들에 대한 배려를 평가해보자는 취지였다.

당시 거의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반기문 외무부 차관보를 지목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출근길에도 반드시 차 문을 내리고 인사하고, 일상에 대해서 물어보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상당수 응답자들은 고위 공직자 중에 그런 경우는 거의 없노라고 지적했다. 이 기획은 한 공직자를 지나치게 밀어준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기사화되지는 못했다.

국민의 정부 당시 반기문 차관은 동기가 장관으로 낙점되면서 사실상 퇴진이 결정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미래의 확실한 장관 감으로 꼽히던 그의 낙마를 외무부 직원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종의 항명 분위기까지 생겨났다. 결국 그는 주유엔 대사로 컴백했다. 참여 정부 들어서는 외교통상부 장관을 거쳐, 한국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이 됐다. 2006년 말이 소식을 접했을 때, 즉각 정부 청사 경비직들을 대상으로 한 약식 조사가 떠올랐다. 반기문 신임 유엔 사무총장이야말로 평소 얻어둔 인심 덕에 인생 최악의 위기를 최고의 기회로 되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인맥 만들기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전통적인 처세법이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다. 몇 년 전 유행이 리바이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강부자·고소영 같은 인맥이 부각됐다. 줄을 잘 서서 성공한 예들도 회자됐다. 심지어 연예계조차 각종 라인이 거론될 정도다. 더욱이 경제·경영 환경은 악화일로다. 근무 환경이 불확실해질수록 믿고 의지할만한 것이 인맥뿐이란 사실이 재확인 되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직장인들은 각종 인터넷과 오프라인 동호회에 가입한다. 동창회나 동문 모임 같은 인기 없던 모임도 다시 각광받고 있다. 이업종 교류도 활발해지고 있다.

인맥도 그리기도 유행한다. 인터넷에서 한 때 세계를 풍미했던 케빈 베이컨 게임과 흡사하다. 케빈 베이컨 게임은 헐리우드의 유명인을 대면 6단계 안에 그와 케빈 베이컨이란 영화배우를 연결 짓는 놀이다. 마찬가지로 국내의 유명인들을 대면, 6단계 안에 그와 접촉할 수 있는 인맥을 동원해보는 게임이다.

이 게임의 기초가 된 것은 지금은 처세술의 기본 법칙처럼 회자되고 있는 네트워크의 6단계 법칙이다(처세술 서적에는 인맥의 6단계 법칙으로 돼 있는 경우가 많다). 1960년대 미 스탠포드대학의 사회학 교수가 이례적인 실험을 했다. 2백여명의 실험자 집단을 미리 구성해놓고, 이들의 주소가 아닌 엉뚱한 주소로 2백통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 겉면에는 ‘이 편지를 반드시 당사자에게 전달해 달라’는 긴급 표시를 해두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여러 단계를 거쳐 대부분의 실험자 집단에게 편지가 전달됐다. 각 편지가 몇 단계만에 당사자에게 전달됐나를 살펴봤더니, 가장 긴 것이 6단계에 불과했다. 학계는 이 실험을 네트워크 이론의 기초로 활용한 반면 처세술 전문가들은 이를 달리 활용했다. 그 넓은 미국조차도 6단계를 거치면 통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인맥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될 수 있다는 결정적인 근거로 이 이론을 이해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인맥 만들기 열풍은 부정적 요소도 있다. 단순히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자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막강하고 센 연줄을 확보하자는 취지가 강해서다. 그래야 어떤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처세의 노하우란 측면이 짙어서다. 말하자면 인맥 만들기 열풍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연고 중심의 사회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연고를 배격하겠다던 참여 정부나 이명박 정부 들어 연고가 오히려 중시되는 것을 목격한 것도 이런 열풍에 한몫했다.

그러나 정작 실제로 위력을 더해가고 있는 것은 인맥 쌓기가 아니라 인심 얻기가 아닐까 한다. 길게 보자면 더욱 더 그렇다. 한 정권에서 위세를 떨쳤던 특정 인맥은 결국 몰락한다. 연예계에서도 인맥을 내세웠던 이들에 비해 인심을 얻은 경우가 훨씬 장수한다. 박경림이나 이휘재에 비해 더 오래 가는 유재석의 인기 비결도 인맥이 아니라 인심이다. 상급자에 줄을 대는 인맥 쌓기에 비해, 인심 얻기는 주로 동료나 하급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든든한 지원군이 돼 준다. 이는 엄청난 자산이 된다. 동료와 하급자를 포함한 다면(多面) 평가가 주를 이루는 성과 중심주의에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준다. 금의환향한 반기문 신임 유엔총장은 인심 얻기의 중요성을 몸으로 보여준 살아 있는 예다.

김방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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