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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거리로 나선 불심 달래기 ‘백팔번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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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右>가 4일 서울 견지동 조계사를 방문해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에게 합장하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김형수 기자]

불교계가 ‘정부의 종교 편향 종식’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자 정부와 한나라당이 분주해졌다. 촛불시위에 성난 불심(佛心)까지 가세할 경우 파괴력과 후유증이 작지 않을 것으로 보고 조기 진화에 나선 것이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4일 ‘종교적 편향성 오해 불식을 위한 특별지시’라는 제목의 공문을 각 부처와 산하기관에 보냈다.

한 총리는 이 공문에서 “최근 일부 부처에서 특정 종교 편향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문제 소지를 제공한 바 있고, 이에 대해 일부 종교단체에서 강력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비록 고의가 아니고 부주의나 실수일지라도 정부의 종교적 중립성을 의심받게 돼 정부의 정책 추진과 국민 화합에 큰 지장을 주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 총리는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업무 추진 과정에서 종교계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며 “특히 종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경우 종교 간 형평성을 고려한 업무 처리가 될 수 있도록 세심히 배려하라”고 지시했다.

최근 국토해양부가 만든 대중교통 이용시스템에 사찰 정보가 누락된 일 등이 불심 이반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을 염두엔 둔 것이다.

전날 선출된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도 공식 업무 첫날 조계사를 찾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예방했다. 불교계와 친분이 있는 최병국·주호영 의원과 조윤선 대변인 등이 함께했다.

박 대표는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로 심려를 끼쳐 죄송스럽다”고 사과했다. 이에 대해 지관 스님은 “잘 하려고 하는 일이고,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며 “또 자꾸 노력하면 앞으로 나가고 안 그렇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나라가 어렵고,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외부적인 요인이 참 많다”며 “이럴 때 부처님의 큰 힘이 우리를 가호해 주시길 빌고 싶다”고 자세를 낮췄다.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의 고위 관계자들은 이날 불교계와의 대화에 사력을 다했다. 청와대에선 맹형규 정무수석과 임삼진 시민사회비서관이 전화통을 붙잡고 불교계 지도자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불심이 돌아선 배경엔 ‘장로 대통령’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등 심리적인 부분이 많아 뾰족한 대응책 마련이 쉽지 않다는 게 여권의 고민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중교통 이용시스템의 사찰 정보 누락 등 불심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건이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론 불교계가 그동안 쌓인 섭섭함을 표출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차라리 특정한 현안이 있다면 해결이 쉽겠지만, 복합적이고 심리적인 부분이 얽혀 있어 대책 세우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한 핵심 관계자는 “문제의 핵심은 불교계와 정부 간에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적었다는 점”이라며 “청와대를 포함한 정부와, 정치권에서 시작한 불교계와의 대화에 상당한 성과가 있어 다음주 초엔 성난 불심이 잦아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기대처럼 이번 사태가 조기에 마무리된다 해도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정부와 불교계 간에 두껍게 쌓인 불신을 걷어낼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언제든 다시 갈등이 폭발할 수도 있어 청와대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  

글=서승욱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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