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뿌리를 안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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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젊은 소프라노 임선혜.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유럽의 고음악 무대에선 샛별 같은 존재다. 그가 얼마 전 국내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서정적이고 정갈하며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가 더욱 아름답게 돋보였던 까닭은 따로 있었다.

# 예정된 공연을 마치고 앙코르 곡을 부르기에 앞서 그녀는 “오늘의 무대는 나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오늘의 나를 있게 했던 세 분의 스승을 위한 자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먼저 무대 바로 앞 좌석에 앉아 있던 롤란드 헤르만 교수를 가리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유럽에서 너를 기다리는 또 한 아버지가 있음을 기억하라”며 자신에게 ‘기대어 울 수 있는 넓은 가슴을 내어준 내 노래의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 또 그녀는 객석 맨 뒤쪽에 앉아 있던 박노경 서울대 명예교수를 가리켜 ‘아름다운 노래는 물론 겸허한 지혜와 깊은 겸손을 가르쳐준 내 노래의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고령의 박 교수는 지금도 임선혜가 노래하는 곳에는 항상 동행한다. 오죽하면 임선혜의 친어머니가 ‘나보다 더 진짜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했을까.

# 임선혜가 마지막으로 소개한 스승은 고(故) 최대석 선생이었다. 그녀가 처음 성악을 배우기 시작할 때 사랑과 열정으로 든든한 머릿돌을 놓아주고 평생 그녀 노래의 수호천사가 되어준 분이었다. 결국 한 분은 나라 밖에서, 또 한 분은 나라 안에서,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하늘에서 늘 지켜봐 주는 셈이라고 이야기한 후 노래를 부르는 그녀는 정녕 아름다웠다. 그리고 행복해 보였다. 오늘의 자신을 있게 만든 뿌리를 알고 노래하기에 더욱 그랬다.

# 누구에게나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이 나의 뿌리다. 야구선수 최동원의 뿌리는 그의 아버지다. 최동원의 아버지는 6·25때 다리를 다쳐 평생 의족을 했다. 야구선수인 아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의족을 한 채 하루 종일 동분서주한 후 집에 돌아와 벌겋게 퉁퉁 부어 오른 다리의 절단된 부위를 뜨거운 물로 마사지하며 고통과 울분이 범벅 된 눈물을 애써 삼키던 아버지를 보면서 최동원은 자랐다. 세간에선 아버지의 욕심이 최동원을 망쳤다고 말하지만 정작 아들 최동원은 “욕먹을 일은 모두 내가 맡겠다. 너는 내 뒤에 숨어라”고 말한 아버지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아 드리고 싶다고 했다. 아니 그 자신이 아버지와 진정으로 화해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모든 나무는 뿌리가 다칠 때 더 아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뿌리와 다투지 않고 화해할 때 진정한 평화를 느낀다.

# 뿌리를 모르면 교만해진다. 교만은 매사에 망하는 지름길이다. 지난달 26일 중국 광둥(廣東)성 산터우(汕頭)대 졸업식에서 이 대학의 명예 이사장이자 아시아 최고 부자로 알려진 리카싱(李嘉誠) 청쿵그룹 회장이 ‘자부지수(自負指數)’ 즉 ‘교만지수(hubris index)’란 제목의 축사를 했다. 그 내용인즉 “자부심이 지나쳐 오만한 자아도취가 되면 인생은 실패를 피할 수 없다. 항상 교만하지 않게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 비결”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과 삶의 영역에서 자부심을 가지길 원한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지나쳐 교만과 오만이 되기 시작하면 삶은 예외 없이 나락으로 빠져든다.

# 여름에 스스로를 뽐내며 웃자란 가지는 겨울에 내리는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여름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는 한여름의 태풍도 견디고 한겨울의 폭설도 이겨낸다. 가지의 무성함이 아니라 뿌리의 깊어짐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대통령의 뿌리는 국민이다. 뿌리를 모르면 교만해져 패퇴하고 뿌리를 알면 겸손하게 승리하는 법이다. 뿌리를 안다는 것. 그래서 중요하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