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한 이라크 민병대들 미·일·영국인 죽여라 외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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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저항세력에 납치됐다 풀려난 허민영 목사가 바그다드 시내 팔레스타인 호텔에서 억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바그다드=연합]

"처음엔 스파이로 오해받아 위험한 상황도 있었어요. 총을 들이대고 일렬로 서라고도 했죠. 일단 의심을 푸는 게 급한 일이란 생각에 평소 배워두었던 스포츠 마사지 시범을 보여주며 당신들을 도와주러 온 의사.간호사들이라고 설명했더니 누그러졌습니다. 풀어줄 땐 검문소까지 배웅해 주더군요."

8일 이라크 시아파 무장세력에 억류됐다 풀려난 한국인 목사 일행은 석방 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종성 목사는 "흥분한 민병대원들이 '미국.일본.영국인은 모두 죽여라'고 말했지만 한국에 대한 감정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한국인 목사 일행 8명은 7일 오후 11시30분(현지시간)쯤 GMC택시 2대에 나눠 타고 요르단 암만을 출발했다. 11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바그다드 서쪽 100㎞ 지점의 라마디 부근. 1시간30분이면 목적지 바그다드에 닿을 수 있었지만 팔루자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미군의 작전으로 봉쇄돼 있었다.

일행은 우회로를 택했다. 하지만 이내 무장한 이라크인 10여명이 나타나 검문을 시작했고 곧바로 일행을 차에서 내리게 한 뒤 스카프로 눈을 가리고 다른 차에 옮겨 태웠다. 일행 가운데 김상미 목사는 낌새를 눈치 챈 택시 운전사가 가속 페달을 밟고 달린 덕분에 납치를 모면했다.

허민영 목사 등 일행 7명은 이후 무장세력의 아지트로 보이는 다섯곳을 옮겨다니며 스파이 혐의에 대해 조사받았다. 한곳에선 일렬로 세우고 총을 들이대기도 했다.

근처에선 미군과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총을 쏘고 도망가면서 검문소에 이를 때마다 허목사 일행을 다른 팀에 인계했다. 추궁이 거듭되던 중 허목사와 홍광천 목사가 기지를 발휘했다. "우리는 의사.간호사들이고 이라크인을 도우러 왔다"고 말했더니 증명해 보라고 요구했다. 이때 허목사가 스포츠 마사지 기술을 보여줬더니 민병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스파이로 오해해 미안하다"면서 물과 음식을 대접하고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고 말했다. "이라크에 병원이 많이 필요하니 도와달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처음에 압수했던 여권과 돈을 모두 돌려줬다.

허목사 일행은 무장세력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미군 검문소 인근에서 풀려났다. 바그다드 시내의 팔레스타인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8일 오후 7시쯤. 납치된 지 8시간30분 만이었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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