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핵무기 신고 안 한 속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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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26일 제출한 핵 신고서는 60여 쪽 분량이다. 북한이 1980년대부터 영변의 5㎿ 원자로와 재처리시설을 가동해 만들어낸 플루토늄 양과 핵 시설 현황 등이 기재돼 있다. 하지만 신고서에는 향후 북핵 협상의 최대 쟁점이 될 데이터가 빠져 있다. 북한이 과연 몇 개의 핵 폭탄을 보유하고 있는지가 기록돼 있지 않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핵무기 제조시설과 핵실험장의 상세 기록은 물론 소재지조차 빠져 있다. 군사기밀이라는 이유에서다.

미국 정보당국은 북한이 8개 안팎의 핵무기를 만들어 이미 보유하고 있으리라고 보고 있다. 핵 신고 대상에 핵무기 및 관련 시설이 제외된 것은 북한의 완강한 거부 입장에 따른 것이다. 다만 신고서에 기재된 플루토늄 사용처를 통해 핵무기 제조 숫자를 추정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과 미국 등 관련국들은 6자회담이 최종 단계인 3단계에 진입하면 핵무기 폐기가 당연히 논의 대상에 포함된다는 입장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핵무기 자체는 3단계의 의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서명한 2005년 9·19 공동성명에 “모든 핵 계획과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을 공약했다”고 명기돼 있다는 점이 근거다.

하지만 북한의 속셈은 그 반대라는 관측이 많다.

북한은 2006년 10월 독자적인 핵실험을 통해 ‘핵 보유국’이 됨으로써 사정 변경의 요인이 발생했다며 새로운 협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칠 가능성이 있다. 3단계 협상을 영변 핵 시설과 플루토늄 폐기로 국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핵 보유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령 핵무기 폐기 협상을 벌인다 해도 대미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로 미룰 것이란 예상도 있다.  

북한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지난해 2·13 합의를 이끌어낸 6자회담 석상에서 “우리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종식돼 어떤 핵 위협도 느끼지 않을 때에 가서는 한 개의 핵무기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며 “그러한 조건이 성숙되기 전까지는 핵무기 문제를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은 ‘북·미 관계 개선’과 ‘핵무장’의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요구하지만 북한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핵무기 논란은 3단계 협상의 어느 시점에 반드시 수면 위로 부상할 전망이다. 협상이 난항에 부닥치면 북한은 2차 핵실험 등으로 또다시 위기 국면을 조성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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