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중앙문예>시 심사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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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예심을 지나온 열일곱분의 응모작들 가운데 이성일씨의 『흰 山』외 9편,배용제씨의 『폐가(廢家)』외 3편,박이현씨의 『공기의 꿈』외 2편,한혜영씨의 『퓨우즈가 나간 숲』외 4편에 대해서 우리는 뭔가 언급할 만하다고 느꼈다.이것은 그 들이 시가 시아닌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짓기 위해 산문적인 것의 평면으로부터 약간 떠오르는,이른바 시적 부력(浮力)을 지니고 있음을말하는 것이며 다른 응모작들에는 그것이 약하거나 없음을 말한다.사람의 말하는 방식가운데 왜 시라고 하는 「제도」가 있는지에대한 최초의 이해마저 되어 있지 않은 가짜 시들을 읽는다는 것은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반면에 「된 시」 혹은 「잘된 시」는읽는다는 의식이 들기도 전에 읽는 눈의 시야를 쏙 빨아들여 버린다.물론 본심이 언 급해야 할 위 네분의 시가 일정한 시적 부력과 함께 「빨아들이는 텍스트」의 힘을 모두 갖추었다고 보이지는 않았다.
이성일씨의 『흰 山』은 단정하다.이것의 시 됨은 가령 『눈은마을에 닿지 않고/산꼭대기 나무나/바위에 닿아 산을/녹인다』나『악착같이/감나무를 달고 있는/감』과 같은 시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산문적인 것의 대체를 통해 그것으로부터 떠오르는 체공력에의해 지탱되고 있다.이런 능력이 그의 다른 시들에서도 고른 높이를 유지하고 있어 그가 앞으로 계속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그러나 고른 높이를 유지케 하는 그 단정함이심사하는 우리들중 한사람에게는 어딘가 낡았다는 느낌을 주었으며,이것은 시를 자기 안에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격률에 의해 만든다는 혐의를 불러일으켰다.
배용제씨의 경우 『폐가』나 『거지의 잠』『먼지의 세월』등은「시적인 것」이 임재하고 있는 삶의 급부를 그가 바라볼 줄 안다는 것을 입증한다.그 삶의 급부는 이를테면 『지워진 길 쪽으로깨진 유리창의 조각난 빛이 튕겨나간다』와 같은 자연주의적 묘사의 잔재미에 빠지도록 유혹하기 쉬운데 시인이라면 동시에 그것에저항해야 할 것이다.왜냐하면 시란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하지않는데서,즉 말과 침묵 사이에서 균형된 어떤 탱탱한 긴장을 받기 때문이다.
박이현씨의 『공기의 꿈』은 잘된 시들이 발휘하는「빨아들이는 텍스트」의 힘이 있다.시가 너무 짧다는 것(9행)이 꼭 이 시의 단점이라고 할 수도 없다.단 두 행으로 인류의 삶을 집약하는 완성된 시도 있기 때문이다.그를 시인의 이름으 로 부르기를아직 유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다른 글들(아직 시가 아닌)에서 들통난,어이없는 결점에 있다.『풀의 감옥』은 우리가 시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를 붙들고 있는 상념이계속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 에 지루한 알레고리에 머무르고 만다.
『퓨즈가 나간 숲』을 시인 한혜영의 처녀림으로 기록하는 기쁨을 우리는 함께 나눈다.그의 다른 시들에서도 우리는 그가 맑고섬세한 시혼을 타고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 섬세함은 『쌈짓돈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 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와 같은 미세화의 무늬를 그린다.그렇지만 그것이 아슬아슬하다.감상주의의 반점들이 그 무늬 위에 번져 있는 점,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이런 유의 시를 몇편 더 쓰다 말지도모른다는 점에 대한 우리의 우려에 반격을 가하는 것은 앞으로 순전히 그의 몫이다.
모두에게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정현종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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