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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그렇게 합시다.』 우변호사는 선뜻 응하고 내일 오후 세시에와달라며 택시기사를 돌려 보냈다.
작은 시골 레스토랑은 아늑하고 청결했다.바다가 보이는 식탁에자리잡았다.식당 한가운데엔 요리가 풍성하게 쌓여 있었다.맘대로덜어 먹는 뷔페, 즉 바이킹식이다.훈제 연어.훈제 정어리.훈제기러기고기,오렌지와 파인애플을 넣어 조린 들 오리 찜,캐비어를얹은 라이브레드,달걀 노른자를 넣어 마시는 뜨거운 쇠고기 장국…. 차디찬 아콰비트 술을 주문하고 「스콜」을 했다.
『이런 건배법이 생긴 연유를 아셔요?』 아리영은 가슴에 술잔을 대어 건배하며 물었다.
『실은 그것이 궁금했었어요.』 『아버지께 들은 얘긴데요.바이킹들은 싸움 끝에 화해 잔치를 벌일 땐 두개골에 술을 담아 건배했다나요.약속을 어기면 이런 해골 바가지를 만들어 주겠다는 뜻으로 그랬다는 거예요.그리고 상대방이 또 언제 기습해올지 알수 없으니까 해골 술잔으로 자기 심장을 가리고 상대방의 동향을살피기 위해 눈을 응시했다는데….
치열한 건배법이 아니겠어요?』 식당 한쪽에서 바이올린 소리가일었다.동양적인 그 가락에 우변호사가 입 끝으로 빙긋이 웃었다. 『저 노래 아십니까?』 『무슨 노래예요?』 『일본 노랩니다.「아카 돔보(あか とんぼ)」,「빨간 잠자리」라는 동요지요.저 악사는 우릴 일본사람으로 오해했나 봅니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함께 유럽을 여행하다 저녁 식사하러 레스토랑에 들르면 식당 악사는 으레 일본 여자들로 알고 일본 노래를 연주했다.그런 경우를 위해 어머니는 항상 악보 여러 벌을 복사하여 들고 다녔다.『아리랑』등 우리 민요와 가 곡의 악보 몇장을 그 악사에게 넘겨주며 한국인인 우리를 위해 코리안 송을 연주해달라고 상냥스레 당부하곤 했었다. 이 집 악사에게도 우린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일러주고 싶었으나 그럴 자신이 없었다.남의 눈을 피해 다니는 처지가 아닌가.크론볼그성에서도 혹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었다.그래서 잠자리눈처럼 큰 선글라스로 온통 얼굴을 가리다시피하여 다닌 것인데….
왈칵 서글픔이 닥쳤다.이 남자를 정정당당히 사랑할 수는 없을까. 곡은 어느새 『러브 스토리』로 바뀌어 있었다.애달픈 가락이 가슴에 스몄다.아리영의 마음을 북돋우려는 듯 우변호사는 춤을 추자고 했다.
좁은 춤마루에서 그에게 안겨 스텝을 밟으며 아리영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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