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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칼럼>이도령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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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춘향전 한 마당은 남원 땅에서 벌어지는 정실(情實)재판이 그클라이맥스다.춘향이는 사법권을 행사하고 있는 어사또가 누군지 몰랐다.그러나 관중은 벌써부터 알고 있다.춘향이의 권력잡은 애인 이도령이란 것을.관중보다 더 미리 알고 있었 던 사람은 이도령 자신이었다.그가 과거에 붙으려고 뼈빠지게 공부한 까닭 자체가 전적으로 기회만 닿으면 이런 호사를 건져내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사사로운 남녀 정분이 미리 개재되지 않고서는 봉건 신분사회 어사출또의 핵심이 성적(性的)상대에 대한 선호와 기피에관련되어 앙심을 품은 권력자로부터 부당한 고문을 당하는 한갖 기생 딸의 인권상의 억울함까지 도달할 리가 없다.심리( 審理)대상도 못되고 말았을 것이다.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재판을 춘향이의 정의(정절)가 마침내 승리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장면이라고 환호한다(나 자신도 이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남녀 관계라고 해서 모두 인력(引力)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특히 여자 쪽은 이유가 있을 때는 오히려 강력한 척력(斥力)을 행사한다.여자가 남자를 선택하는 것은 장차 자기가 배어 낳을 아이의 유전자를 대강이나마 자신이 선택해 보겠 다는 의지라고 한다(춘향이 같은 정절녀도 겨우 남자만 선택할 수 있을 뿐,그 남자의 어떤 유전자 조합이 자신의 어떤 유전자 조합과 결합할지는 순전히 확률 내지 운명의 선택이다.그렇게 결합된 유전자 한 벌로 태어나는 아이가 생존하고 재생산을 이어갈지 어떨지는 넓고 길게 보아 자연의 선택이다).성춘향은 변학도의 유전자를 기피했던 모양이다.아무튼 이몽룡이냐,변학도냐,선택권은 춘향이한테 있었다.이것은 미래의 생명에 관련한 여성만의 특권이라서정의를 내세우는 이가(李 哥)나 변가(卞哥)의 정치적 또는 사법적 권력은 여기에 비하면 잠깐 깔쭉거림에 지나지 않는다.그래서 몽룡전이나 학도전은 되어도 안되고,춘향전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태우(盧泰愚)씨와 재벌 사이를 정경유착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한다고 나는 여긴다.유착이라는 것은 애착과 밀착 때문에 생긴 염증으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할 두 기관이 붙어버린 상태다.이몽룡 아닌 다른 어 사가 출또해 변학도가 성춘향에게 수청들기를 강요하고 있는 관계를 남녀유착이라 규정짓고 동일 사건의 쌍벌 범죄자로 춘향이마저 기소했다면 누가 그 춘향전을 소린들 하며 누가 그 소리를 듣긴들 하랴. 상인이란 시장에 내놓은 물건은 돈이 될만하면 모두 거래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다.가는 길엔 생선을 팔고 오는 길엔 곡식을 팔 수도 있다.그런데 정의와 권력을 쥐고 있는 나랏님이 길을 막아 서서 장사 길을 가려면 길세를 내놓 고 가는것이 좋을 것이라며 넌지시 수작을 걸어온다면 뉘라서 그 길세를안내겠느냐 말이다.나랏님은 그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 챙겼다.
이 나랏님은 자기 손에 쥔 권력과 정의를 보여 주었으나,상인들이 실제로 산 것은 사지 않으면 불이익 을 주겠다는 거절할 수 없는 판촉물만이었음이 대부분이다.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공짜인데 유독 한국에서만 대통령이 판촉물을 돈을 받고 길세 삼아,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비싼 값을 받고 판 것이다.
경제는 여성적이다.생산하고 키우며 돌본다.정치는 남성적이다.
어떻게 보면 하는 일없이 밥을 축내고 반짝거리는 털을 뽐내며 힘이 넘치면 뒷발질이나 하면서 빈둥거리다 때가 오면 자기 몸속의 정충이나 공급하는 종마(種馬)같은 존재인지도샤 모른다.그런데 우리나라는 정치 과잉이다.종마는 귀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정치는 천한 것이 되고 말았다.
높은 뫼 같은 역경(易經)학자 대산(大山)김석진(金碩鎭)씨는송(宋)나라때 천재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바탕으로 계산해 지금이 선천시대에서 후천시대로 넘어가는 오회중천(午會中天)시대라고 언명한다.그는 선천은 남성이 고 후천은 여성이라고 푼다.그의 이 말을 듣고 나는 선천이 정치적 의(義)의 시대였다면 후천은 경제적 이(利)의 시대일 것으로 전망한다.맹자(孟子)가 지금 살아있다면 利를 앞세우지 않고 義를 앞세우는 양혜왕(梁惠王)을 만나면 도리어 비판하리라.
선천시대에는 利는 만인을 분열시키고 義는 만인을 결속시켰으나,후천시대에는 경제적 利가 만인을 화합시키고 정치적 義는 만인을 분열시키기 딱 좋게 되어가고 있다.노태우 전대통령과 그에게돈을 준 재벌을 재판함에 있어 이렇게 크게 변화 한 실정(實情)을 아는 어사또의 출또가 몹시 기다려진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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