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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덧없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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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호 16면

1 남성용 턱시도를 여성용으로 변형한 ‘르 스모킹’ 라인. 1966년 가을겨울 시즌을 겨냥해 디자인된 이 룩은 남성 복식과 여성 복식의 구분이 확연하던 당시로서는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2,14 미술 애호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던 이브 생 로랑은 몬드리안의 작품을 디자인에 차용함으로써 미술과 패션의 성공적 결합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3 ‘이브 생 로랑’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디올의 왕자’ 덕분에 당시 파리의 귀부인들은 젊고 모던한 드레스를 입을 수 있게 되었다. 1964년 봄여름 컬렉션

2008년 6월 1일 20세기 패션사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한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인 이브 생 로랑이 세상을 떠났다. 2007년 봄 뇌암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죽음의 결정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세상에 알리지 않은 채 71세의 디자이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브 생 로랑은 뛰어난 디자이너 그 이상이었다. 비범한 재능을 타고난 천재였고, 자신의 재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한평생 스스로와 고독한 사투를 벌이다 간 투사였으며, 여성의 옷 입는 방식과 패션을 둘러싼 고정관념을 변화시킨 혁명가였다. 그는 젊음과 우아함, 길거리 패션과 오트 쿠튀르, 자유와 정숙함이 각기 서로를 배척하는 요소가 아님을 증명해 내고 패션과 예술이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6월 1일 타계한 이브 생 로랑의 발자취

열두 살에 이미 패션쇼를 연 천재 소년
본명은 이브 앙리 매튜 생 로랑. 보험회사 간부인 아버지와 열렬한 패션 애호가로서 아들의 재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이브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책을 읽지 않을 때는 두 명의 여동생에게 인형 옷을 만들어 주었을 정도로 자상한 오빠였던 이브 생 로랑은 열두 살 때 어머니와 동생들 앞에서 자신만의 패션쇼를 열었을 만큼 일찌감치 패션에 대한 재능을 드러냈다.

예술을 공부하고 싶었던 이브는 열일곱이 되던 1953년 부모의 곁을 떠나 파리로 향한다. 패션계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도 이때다. 파리로 온 이브는 프랑스 ‘보그’의 아트 디렉터 미셸 드 브룬호프의 권유로 어느 패션 관련 협회에서 주최한 콘테스트에 참여하고, 이곳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크리스찬 디올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디올은 이브 생 로랑을 자신의 어시스턴트로 고용했는데, 생 로랑의 스케치가 자신의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게 이유였다.

4 상의와 하의가 하나로 연결돼 있는 점프 수트를 고안해 낸 것도 이브 생 로랑이었다. 1968년 디자인한 버뮤다 점프 수트 5 이브 생 로랑은 시즌에 따라 직선과 곡선, 절제와 풍성함 사이를 넘나들었다. 1971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코트 드레스 6 남성복의 디테일과 실루엣을 차용한 여성용 수트를 디자인함으로써 여성 수트 하의는 당연히 스커트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했다. 1975년 봄여름 컬렉션 7 아프리카는 이브 생 로랑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마르지 않는 우물’이었다. 아프리카 수렵 복장을 캣워크로 옮겨 놓아 화제를 모았던 사파리 룩. 1969년 봄여름 컬렉션 8 1975년 봄여름 컬렉션

크리스찬 디올의 후계자로 살았던 나날들
디올의 어시스턴트로 보낸 4년 동안 이브 생 로랑은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평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한 온천 휴양지에서 크리스찬 디올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이브 생 로랑은 하루아침에 디올의 후계자가 된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하나.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안경을 낀 수려한 용모의 후계자에게 전 세계의 관심이 쏟아졌다.
뚱뚱하고 활발한 성격으로 ‘패션 외교관’이라 불릴 만큼 사회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크리스찬 디올과 대척점에 있는 수줍음 많은 청년을 두고 사람들은 ‘기대 반, 우려 반’의 반응을 나타냈다. 하지만 1958년 1월 이브 생 로랑이 선보인 첫 번째 디올 컬렉션은 사람들의 우려를 말끔히 종식시켰다.

9 우아한 곡선미로 극찬받았던 1984년 봄여름 컬렉션 10 인도 전통 복식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1992년 가을겨울 룩 11 2002년 이브 생 로랑이 세상에 내놓은 마지막 컬렉션

이 컬렉션에서 이브 생 로랑이 내놓은 트라페즈(A자 모양으로 아래로 갈수록 통이 조금씩 넓어지는 실루엣) 드레스는 디자인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새롭지 않았지만, 그것을 내놓은 것이 오트 쿠튀르 하우스라는 점에서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스물한 살짜리 청년에 의해 파리를 대표하는 오트 쿠튀르 하우스가 더 젊고, 더 활기찬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언론은 입을 모았다. 버블 실루엣과 비트족에게서 영감을 받은 비트닉 컬렉션 등 그가 연달아 내놓은 컬렉션은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디올의 매출은 꾸준히 증가했다.

이브 생 로랑, 성공 신화의 시작
그러나 ‘디올의 왕자’로서의 삶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60년, 프랑스 군대가 이브 생 로랑을 ‘소집’한 것. 하지만 훈련소에서 보름 남짓 지낸 그는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쇠약 증세가 악화되면서 징집에서 해제된다. 이브 생 로랑은 디올 하우스로 돌아가는 대신(디올의 후계자 자리는 이미 마크 보한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피에르 베제(한평생 이브 생 로랑의 충실한 조력자였던 베제는 이브 생 로랑이 세상을 떠나던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와 함께 자신의 하우스를 여는 쪽을 택했다.

그의 나이 스물네 살, 1962년 1월에 자신의 이름을 단 첫 번째 컬렉션을 내놓았고 사람들은 스타 디자이너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 신문들은 “샤넬과 발렌시아가·디올의 뒤를 잇는 디자이너”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고, 당대 사교계를 주름잡던 귀부인들은 그의 의상을 사기 위해 부티크로 몰려들었다. 샤넬, 발렌시아가, 위베르 드 지방시 같은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어깨를 견주긴 했지만 이브 생 로랑은 그들과는 달랐다. 시즌이 바뀌어도 큰 변화를 드러내지 않았던 다른 쿠튀리에들과 달리 이브 생 로랑은 늘 컬렉션의 컨셉트를 변화시킴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내놓는 치마 길이는 종아리 중간에서 허벅지 중간으로, 발목에서 무릎으로 시즌에 따라 달라졌으며 실루엣 또한 크게 변화했다.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원칙은 “좋은 옷이란 런웨이를 화려하게 수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객들이 실제로 입을 수 있는 옷”이라는 그의 철학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언제나 경계를 뛰어넘는 디자이너였다. 남성용 턱시도 수트를 여성용으로 변환한 ‘르 스모킹’을 통해 남성복과 여성복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었는가 하면(‘르 스모킹’은 많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면서 앤드로지너스 룩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프리카 수렵 복장으로 여겨지던 사파리 재킷을 패션 아이템으로 변형했고, ‘싸구려’로 치부되던 히피 룩을 하이패션으로 승화했다. 패션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그 둘의 성공적 결합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 준 것 또한 이브 생 로랑이었다. 어머니가 건네준 몬드리안 화보집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던 ‘몬드리안 드레스’는 20세기 패션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의상 중 하나로 손꼽힌다.

단호한 사업가적 기질 발휘
평소엔 수줍고 말이 없는 데다 예민하기 그지없는 이브 생 로랑이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현실화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 강한 추진력을 보여 준 사업가였다.
쿠튀르가 침체기에 접어들고 젊은 세대가 새로운 소비 계층으로 부상하던 1960년대 중반, 그는 쿠튀리에로서는 처음으로 젊은 세대를 위한 라인 ‘이브 생 로랑 리브 고쉬’를 만들어 젊은이들도 쿠튀리에가 만든 완성도 높은 의상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는 패션사에서 ‘레디투웨어’ 라인의 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패션의 중심 소비 계층이 40대 귀부인에서 20대 젊은이로 넘어갈 것을 남들보다 한발 앞서 예감한 이브 생 로랑은 젊은이들의 패션에 늘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 결과물의 하나로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청바지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사업가적 기질이 가장 큰 빛을 발한 것은 1971년이었다. 하우스의 첫 번째 남성용 향수를 내놓으면서 수줍음 많고 말수 적기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직접 전라의 모습으로 광고에 등장한 것. 향수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이브 생 로랑은 오피움을 비롯해 다양한 향수를 뒤이어 내놓으면서 코스메틱 분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삶
모든 천재의 삶이 그렇듯 이브 생 로랑의 삶도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피로한 천재였다. 스물한 살에 디올의 후계자가 된 후 지속적으로 쏟아진 세간의 관심은 심약한 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그 때문에 적지 않은 시간을 신경쇠약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질병보다 그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그의 부재를 둘러싸고 터져 나오는 소문들이었다. 마약 중독설과 알코올 중독설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사업이 정점에 달했던 1980년에는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둥, 에이즈 감염자라는 소문까지 터져 나왔다.

2002년 자신의 레이블을 구찌 그룹에 넘기고 패션계를 떠나면서 남긴 “그 어느 때보다 지금 행복을 느낀다. 늘 새로운 룩을 발표하던 시기가 그립기는 하겠지만 은퇴가 고통스럽거나 괴롭지는 않다”던 그의 말은 한평생 어깨를 짓눌렀던 스트레스와 부담감의 고통을 엿보게 한다. 이제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어쩌면 지금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살아생전 가장 좋아했다던 프루스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지도. 그의 죽음이 더할 나위 없이 슬프지만, 패션계의 모든 사람이 그의 죽음을 묵묵히 참아낼 수 있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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