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또 사면이냐, 법과 원칙 무너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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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가 어제 이명박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도로교통법 위반 사범 등 282만여 명에 대해 특별사면과 행정처분 특별조치를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사면·특별조치 대상에는 운전면허가 취소·정지되거나 벌점이 누적된 생계형 운전자 등이 포함됐다.

법무부는 “운전면허 관련 제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생계형 운전자 등에게 다시 한번 운전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국민 화합을 도모하고 서민 생활의 안정을 기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트럭 하나로 생계를 꾸려가다 교통법규를 위반해 먹고살기조차 힘든 서민을 배려하겠다는 정부의 취지는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면은 법과 원칙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남용돼선 안 된다. 더구나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사면권을 오·남용하지 않겠다고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럼에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촛불집회 등으로 가뜩이나 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기초질서 위반자들을 사면해줬으니 선심적인 사면권 행사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사면권은 헌법상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하지만 사법권 독립이나 법과 원칙에 반하는 예외적 조치다. 따라서 이를 발동하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들을 사면해준다면 누가 이를 지키려 하겠는가. 실제로 교통법규 위반 사범에 대한 사면조치가 교통사고 증가로 이어졌다는 통계도 있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3월(532만 명)과 2002년 7월(481만 명)에, 노무현 정부는 2005년 8월(420만 명) 교통법규 위반 사범에 대한 대대적 사면을 단행했다.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교통사고율(대인 배상 보험 가입자 기준)은 98년 사면 이전 1년간 3.11%에서 이후 3.44%로, 2002년의 경우 4.66%에서 5.11%로, 2005년엔 5.33%에서 5.82%로 각각 증가했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이번 사면이 올해 3월 신설된 사면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친 공정하고 투명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역대 어느 정권보다 법과 원칙을 강조한 게 이명박 정부다. 법과 원칙을 무너뜨리는 선심성 사면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한·영 대역Grant pardons judicious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