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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강1만리>18.옛군대 마당놀이 地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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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거기 연개소문이 있었다.연개소문은 수나라의 100만대군을 격파하고 당태종에게 씻을 수 없는 좌절을 안겨준 고구려의 대장군.
그는 마당놀이에 등장하는 탈이 되어 중국 귀주성의 작은 마을 박물관에 걸려있었다.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임을 만난 기분이랄까,반가움이 왈칵 눈물처럼 치밀었다.
연개소문의 탈은 부릅뜬 눈,붉은 수염,푸른 얼굴이다.지희(地)탈중 흉포한 오랑캐를 나타낼 때 쓰는 색깔이며 모습이다.고구려 민족혼의 표상인 연개소문은 중국인들에겐 한족왕조를 멸망케한오랑캐 장수일 따름이었다.그것도 시시한 오랑캐가 아니라 수나라가 망한지 1,300년,그 긴 시간의 흐름 내내 민간 마당놀이에 등장해 중국인들의 간담을 두고두고 서늘케 하는 흉신악귀의 대명사인 것이다.
지희는 귀주성의 군대주둔 지역인 둔보(屯堡)를 중심으로 이어져온 옛 군대의 마당놀이다.현재는 농민들로 구성된 지희 놀이패가 대개 마을마다 하나씩 있고 그 패마다 전승되는 독특한 레퍼토리가 있다.『삼국연의』『양가장』『봉신연의』나 항 우와 유방의이야기인 『초한상쟁』등 충효와 의리를 강조하는 전쟁얘기를 즐겨다룬다.최근에는 반역과 도둑의 얘기를 그렸다해서 이전까지 금기시됐던 『수호전』이 공연되기도 한다.이는 지희가 내용과 소재에서 자유로워지고 군대의 오락에서 민 중의 오락으로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탐사팀이 찾은 안순현(安順縣)채관둔(蔡官屯) 역시 명나라 군대의 옛 주둔지고 주민 또한 이들의 후예다.공연내용은 『설정산의 서방정벌(薛丁山征西)』중 절정부분인 설정산이 반리화에게 세번 잡혔다가 세번 풀려나는 장면.본래 천상에서 사 랑하던 사이인 금동과 옥녀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인간세상으로 쫓겨난다.금동은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아들 설정산으로,옥녀는 오랑캐 장수의 딸 반리화로 태어난다.옥녀는 하계로 내려오다 기묘하게 생긴 거북이를 보고 한차례 웃었다.거북 이는 옥녀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오해해 그녀를 따라 오랑캐 장수로 환생해 인간세계로 내려온다.금동과 옥녀,그리고 거북이.이들 사이에는 전생의 인연과 함께 묘한 삼각관계의 갈등이 예비된다.
우여곡절 끝에 반리화가 설정산을 감복시켜 결국 둘은 부부로 맺어진다는게 줄거리다.
두시간동안 뛰고 찌르는 투박한 동작이 계속됐다.열십자걷기(十字步)등 군에서 사용되던 보법도 여전히 남아있다.말투도 옛 그대로다.대화체가 아니고 『화자(話者)가 말하기를…』하는 식의 3인칭 서술체다.소리도 옛소리다.징과 북이 악기의 전부다.그러나 이 투박함 속에는 마을 공동체의 정이 가득하다.70노인의 멋진 발차기에 환호가 터지고 말역을 맡은 마을꼬마의 서툰 달음박질에 웃음이 터진다.반리화역을 맡은 70세의 마을 촌로 유덕명옹은 열두살때부터 지희에 참가했다고 한다.
원래 한족(漢族)의 놀이인 지희는 귀주지역의 소수민족들에게도그대로 전파됐다.안순지역의 180여개 지희중 한족의 것이 160여개고 나머지 20여개는 뿌이족(布依族)의 지희다.채관둔 한족 지희가 차츰 관객을 의식하는 공연형태로 바뀐 데 비해 화계현(花溪縣) 뿌이족의 지희는 놀이이자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의식이었던 옛 지희의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었다.
지희의 유래는 명나라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홍무 14년(1381년) 귀주 일대의 원나라 잔재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30만 대군을 파견했다.그 군인들은 대부분 귀주에정착했다.「반역의 싹」을 뽑으려는 명태조가 이들 의 귀향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들이 바로 오늘날 노한인(老漢人)또는둔보인(屯堡人)이라 불리는 한족들이다.
둔보인은 향수를 달래고 또 무력해져가는 무술도 연마할 겸 무술이 주가 되는 전쟁 이야기를 공연해 오락으로 삼았다.이것이 지희의 시작이다.전쟁 이야기라 지금도 남자들만 출연한다.아편전쟁후 아편의 주 재배지였던 귀주에는 아편을 피우는 이가 많아 이들을 정상적인 오락으로 유도하기 위해 지희를 장려한 것이 또이 일대 지희를 크게 흥성시키는 계기가 됐다.
귀주의 둔보인은 지금도 명나라때의 언어.복식등 유풍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이들은 요즘 자신들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해 달라는별난 청원을 내고 있다.지금의 한족과는 말도 풍습도 다르다는 이유다.게다가 소수민족이 되면 1자녀 제한에서 벗어나고 장학금.특례입학등 각종 경제.사회적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통 한족의 후예였으되 이제는 한족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모습은 언어와 풍습,그리고 실리가 민족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중국의 현실을 비춰내는 또 하나의 거울 이었다.
▧ 다음회는 「사진보다 더 생생한 파스텔 세계-목판화」편입니다.
글 오수경 한양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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