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손 맛] 전남 영암 어란, 얇게 저며 머금으면 바다 향 입안 가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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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자씨가 숭어 알집을 말린 뒤 참기름을 바른 어란을 손질하고 있다.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예부터 민어·숭어·청어 등 몸집에 비해 알이 많은 물고기는 알집을 통째로 말려 술안주나 반찬으로 먹었다. 이 건(乾)어란 가운데 숭어의 것을 최고로 쳤다. 향미가 독특하고 기름질 뿐만 아니라 알집의 막에 탄력이 있어 모양새가 좋고 보존이 쉬웠기 때문이다. 개중에서도 영산강 물과 만나는 바다에서 잡은 숭어로 만든 영암 어란을 으뜸으로 쳤다.

전남 영암군 영암읍 ‘어란의 집’ 김광자(82)씨는 시할머니·시어머니에 이어 100년 이상 숭어 어란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1999년 해양수산부 장관으로부터 전통수산식품 어란제조 부문 명인으로 지정받기도 했다. 요즘 김씨의 2층 건물 옥상 작업장에는 반투명 갈색의 길쭉한 알집이 두 개씩 붙은 나무판이 가득 널려 있다.

“공력이 아주 많이 들어. 성질 급한 사람은 절대 못 만들지. 어란 맛이야말로 손끝과 정성에서 나오는 거야.”

숭어는 4월 중하순 영암·해남의 남해안에서 잡은 산란 직전의 참숭어만 골라 쓴다. 배를 갈라 한 쌍의 알집을 빼낸 뒤 소금물에 대여섯 시간 넣어둬 핏물 등을 뺀다. 이어 조선간장을 푼 소금물에 하루 동안 담가 간을 하고 갈색 물을 들인다. 김씨는 “소금물 농도와 간장 물에 담그는 시간은 알의 크기에 따라 잘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건조작업은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뒤집기를 반복하며 한다. 수분이 어느 정도 빠졌을 때 돌을 얹었다 내리기를 사나흘 동안 되풀이하면 모양이 납작해진다. 이때부터 하루 이틀 간격으로 참기름을 바르고 마르면 다시 바르는 일을 20일가량 계속해야 어란이 완성된다. “알이 작은 것도 수백 번 손이 가야 물건이 돼. 무게가 900g이 넘는 것도 만들어 봤는데 석 달 가까이 씨름을 했지.”

김씨는 한 해 300~500쌍의 어란을 생산한다. 보통 크기인 무게 200g짜리 한 쌍을 김씨에게 직접 사도 10만원은 줘야 한다. 백화점 등에서는 고급스럽게 포장해 20만원 안팎에 판다. 어란은 1.5~2㎜ 두께로 얇게 썰어 앞니로 자근자근 씹으면 고소한 맛과 향이 입 안에 퍼진다. 칼도 불로 데워 썰어야 기름이 배어나와 제 맛이 난다.

부자였던 김씨의 시집은 귀한 손님이 오면 직접 만든 어란을 내놓곤 했는데, 가세가 기울어 식당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어란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이 집안의 어란 솜씨는 며느리 이옥란(51)씨와 딸 박만자(61)씨에게 4대째 이어 내려오고 있다. 딸 박씨는 “요령 피우지 않고 제대로 정성을 들여야 ‘진맛’을 지킬 수 있다고 자주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영암=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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