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검찰의 몫,정치의 몫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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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눈앞에는 「대통령의 재(財)테크」라는 제1막이 끝나고 「YS와 DJ의 대결」이라는 제2막이 펼쳐지고 있다.제1막만 해도 긴장과 흥분의 연속이었는데 그것이 지루해질만 하자 극적 장면전환으로 전혀 다른 제2막을 펼치는 연출솜씨가 과연 9단들답다.
「YS와 DJ」라면 보고 또 본 연극이지만 언제 보아도 싫증안나는 『춘향전』의 어사출두 장면처럼 흥미롭다.더구나 이번엔 DJ가 비장한 어조로 「이기느냐,파멸이냐」라는 햄릿 뺨치는 대사까지 읊조리고 있으니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비극은 관객인 국민이 언제까지 구경이나 즐기고 있을수만은 없다는데 있다.이번 연극은 제1막도,2막도 마치 브레히트의 연극처럼 무대와 객석의 구분도 없고,그래서 싫든 좋든 무대위의 배우들과 호흡을 같이 하고,진행을 같이 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 비극이다.
무대위는 바야흐로 피비린내나는 활극이 금방이라도 벌어질 분위기다.그러나 잠시 무대에서 눈을 돌리고 생각해보면 이건 활극이아니라 딱 떨어지는 희극이다.관객이 보기엔 백로의 탈만 썼지 실은 온통 까마귀들 뿐인데 서로 상대방을 삿대질 하며 「네가 까마귀」라고 악다구니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사자도,수사관도 아닌 이상 세세한 숫자까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지난 날의 정치와 선거가 돈정치.돈선거였음은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바로 지난번 대선도 예외는 아니었다.선거는 정치인만 치른게 아니라 국민들 도 함께 치렀던 일이 아니던가.
그런 너무도 뻔한 일을 가지고 「너는 까마귀고 나는 백로」라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지난 대선때 20억원을 받았는데 그 돈이 부정한 돈인줄 몰랐다」거나 「나는 한 푼도 직접 받은 적이 없다」는 말에는 그저 허허하고 웃을 수밖에는 없다.
노태우(盧泰愚)씨에게 공로가 있다면 우리 정치의 악성 종양인정치자금이란 이름의 검은돈을 수술할 계기를 마련해준데 있다.그것은 이번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터져 나오지 않을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치권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모두가 고해를 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 당연한 순서요,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그러나 지금 정치권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검찰이 모든 것을 밝혀낼 것이니 기다려 보라는 말도 하고 있다.물론 제대로만 한다면 검찰이 못 밝혀낼 것도 없다.그러나과연 바로 엊그제까지 정치의 그늘에 있던 검찰이 어느 날 갑자기 정의의 여신이 돼 모든 것을 낱낱이 캐내고 밝 힐 수 있을것인가. 검찰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盧씨의 부정축재에 관해서라면몰라도 그 이상의 것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어차피 검찰의 업무란 범법여부,범죄구성 여부를 밝히고 단죄하는 것이지 정치의 내막이나 국민의 의혹 을 해명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총수의 소환퍼레이드까지 벌여도 의혹이 줄기는 커녕 커지기만 하는건 검찰의 몫과 정치의 몫이 뒤범벅돼 있는데 있다.당연히 정치권 스스로가 해명해야 할 일까지 몽땅 검찰에 맡겨 놓고엉뚱한 삿대질만 하고 있는데 있다.준 사람,받은 사람이 누구인데 왜 검찰에 모든 것을 떠넘기나.
우리 사회의 고질병은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못하는데 있다.언제나 모든 것을 수사로만 끝내려 한다.성수대교사고.대구가스폭발사고.삼풍사고가 그랬다.그러니 책임자를 가려내 아무리 중벌해도 그 근본원인은 그대로 남아있게 마련이다.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들 현재의 관행과 제도와 법을 그대로 둬서는 검은 거래가 끊길 리 없다.사회가 온통 검은돈 때문에 떠들썩한 이 판에도 정치인들은 생각을 고쳐먹기는 커녕 마치 불경기를 호소하는 시장 상인들처럼 돈이 안 들어와 죽 을 지경이라는 푸념이나 늘어놓고 있다.
지금은 집단싸움할 시간이 아니라 집단 고해성사를 할 시간이다.우선 고해성사부터 하고 검은돈이 필요없는 새 정치의 길을 찾는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그것이 아마도 정치권이 공멸(共滅)을면할 유일한 길일 것이다.제3막에선 그런 극적 반전(反轉)을 보여줘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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