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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하나의 프레임에 담긴 18막 스토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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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Harrow.
평원 지대인 이 곳의 딱 하나 있는 구릉 위에는 Harrow School이 자리잡고 있다. 다리품을 팔지 않고도 근처 어디서든 그 '고결한' 몸을 우러러 감상할 수 있는 언덕 위의 해로우 스쿨. 이튼 스쿨과 함께 영국의 최고 명문학교로 꼽히는 이 곳은 윈스턴 처칠이 수학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현재는 ‘해리포터’ 영화 촬영지로 더 유명해졌다. 물론 교육열 높은 한국 맹모들의 노력으로 한국 학생들이 해마다 정원을 늘려가고 있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린 근처의 Westminster 대학에 볼 일이 있어 그 곳에 갔기에 잠정 골프 휴일을 선포한 터였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만난 그 곳의 한 목사님께서 대학 건물과 인접한 Northwick Park이라는 골프장을 소개해주셨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곳에 가면 놀라운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에, 오후 5시가 가까운 시간 임에도 나인 홀 플레이만이라도 해보자고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Northwick Park라는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이 곳은 골프 클럽이라기 보다는 도심 속의 골프 테마 공원 같은 곳이었다. 옛 것에 열광하는 영국인들 답지 않게 현대적 골프 시설물과 네온이 빛나는 펍과 레스토랑을 갖춘 신세대형 골프 파크였다. 골프 샵도 크고, 연습장도 훌륭하고, 어드벤쳐 퍼팅장과 파3연습장도 가히 아름다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뭣보다 기가 막히는 것은 US오픈, 브리티시오픈, 라이더컵 등이 열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골프장, 하고도 각 골프장의 시그니쳐 홀을 그대로 복제해 놓은 여섯 개의 홀이 The Major Golf Course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디자인 도용의 날카로운 법적 책임을 피해가기 위해 'Inspired by'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쓰고는 있었지만 이용자 측면에서 그런 복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세계 최고의 홀들을 한 곳에서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니 말이다. 흡사 김태희의 눈, 한가인의 코, 이나영의 입술에, 송혜교의 얼굴형과 전지현의 머리, 한채영의 몸매를 조합한 완벽 미인을 알현하는 셈이니 이게 웬 떡인가.
첫 번째 홀부터 US오픈이 열린 Riveria의 6번 홀, Walker Cup이 열린 Ganton의 14번 홀, US PGA가 열린 Oak Hill의 6번 홀, Ryder Cup이 열린 The Belfry의 9번 홀이 차례로 펼쳐졌고, 다섯 번째 홀에 이르자 브리티시오픈이 열린 Royal Birkdale의 12번 홀과 Royal Troon의 18번 홀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마지막 홀에선 마스터스가 열리는 Augusta의 12번 홀과 16번 홀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직 골프 내공이 미약한 탓인지 타고나길 빈약한 기억력을 가진 탓인지 어느 골프장을 가든 18홀을 복기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나였지만 이 곳의 한 홀 한 홀은 기억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통일성은 없었지만 홀 별 개성만큼은 확실했다. 대륙을 건너뛰는 홀들의 조합인데 오죽할까? 레이아웃의 우수성이야 세계 최고들만 샘플링해 놓은 종합 선물 세트라 할 만하다. 막 오픈한 코스임에도 잔디 관리 상태까지 좋았다. 이 곳은 이미 영국 The Times와 Golfdigest에서도 기사화되며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라운드를 마친 우리의 결론, 골프장의 18홀은 하나의 프레임에 담겨있는 18막의 스토리라는 것이다. 스토리는 한 번의 클라이막스를 만들기 위해 기승전결의 단계를 거치고, 주연을 빛내주기 위한 조연들이 다수 등장하게 된다.

제 아무리 허접한 깡시골의 골프 코스라도 18홀은 그 나름의 리듬을 갖고, 자신의 얘기를 한다. 그리고 골퍼는 그 리듬을 타며 코스와 소통을 시도하며 때로는 반박하고 때로는 순응하며 스스로 18홀의 결론을 도출해가는 것이다.

세계적 명곡들의 클라이막스 만을 엮어 만든 음악이 감동을 만들 수 없고 성형 수술 시 가장 선호된다는 김태희의 눈, 한가인의 코, 송혜교의 얼굴형이 합성된 얼굴에서 매력을 찾을 수 없듯, 세계 최고의 시그니쳐 홀만을 조합해 놓은 The Major 골프 코스는 이벤트는 될 지언정 감동이 실린 스토리는 전하지 못했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