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가 아끼던 대논객 陳布雷의 비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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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호 38면

저장성 교육청장 시절의 천부레이(가운데). 김명호 제공

1947년 여름 국민당의 베이핑싱잉(北平行營) 전파관리소는 중공의 비밀 전파 발신지를 확인했다. 한 주택의 지하실이었다. 국방부 보밀국(保密局)은 경악했다. 천부레이(陳布雷)의 딸과 사위가 집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2>

천부레이는 기자 출신이었다. 일찍부터 대정론가 소리를 들었다. 반봉건과 국민국가의 수립, 외세 배척과 군벌 타도, 혁명의 당위성을 피력하던 글들은 지금 봐도 힘이 넘친다. 36세 되는 해에 난창(南昌)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났다. 장제스는 그를 보는 순간부터 가까이 두고 싶어 했다.

천부레이는 그러나 “체구가 왜소해 보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고, 잠시만 서 있어도 다리가 떨리고 현기증이 난다”며 완강히 거절했다. 또 “정치가 체질에 맞지 않고 소질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국민당에 가입은 했다. 장제스는 그를 중앙당 부비서장에 기용했지만 상하이로 돌아가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주필로 근무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때부터 장제스의 중요한 문건들을 관리하고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지만 정치적인 일에는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당내의 모든 파벌이 그를 서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저장(浙江)성 교육청장, 교육부 상무차장, 당 중앙선전부 차장 등을 거쳤지만 그에게는 모두가 허직(虛職)이나 다름없었다. 장제스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고지식할 정도로 “선비는 자신을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에 철저했다. 어느 파벌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자기 사람을 만들지도 않았다. 표면에 나서는 적이 없었고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으며 사치와도 거리가 멀었던 그를 장제스는 애지중지했다.

‘당대완인(當代完人)’이라는 휘호를 선물할 정도였다. 신설된 시종실의 2처 주임으로 근무케 했다. 군사와 당무를 제외한 재경·외교·문교·교통·민정이 2처 소관이었다. 1처 주임은 여러 사람이 역임했지만 유독 2처만은 10년간 변동이 없었다. 극소수의 원로 외에는 이름을 부르는 게 습관이었던 장제스였지만 천부레이에게만은 “부레이(布雷) 선생”이라고 부르며, 의논할 일이 있으면 직접 그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본인만 빼고는 모두가 그를 명실상부한 2인자라고들 했다.

중공도 일찍부터 그에게 눈독을 들였다. 특히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심할 정도로 집착했다. 시도 때도 없이 문안 편지를 보냈다. 대꾸가 없자 천의 조카에게 “우리 당원들은 부레이(布雷) 선생의 문장을 볼 때마다 감동을 받고 선생의 도덕성을 존경한다. 그러나 선생의 붓과 도덕성이 한 사람만이 아닌 전체 인민을 위해 봉사해 주시길 간절히 요망한다”는 말을 했다. 조카가 말을 전하자 천은 “나도 저우 선생을 존경한다. 그러나 공산당에 언라이(恩來) 선생 같은 분이 많지 않은 것이 애석하다”며 “나는 글 쓸 자격을 이미 상실한 사람이다. 하잘것없는 기록원일 뿐이다”고 말했다.

중공 상하이국 조직부는 웬융시(袁永熙)라는 베이징의 지하당원을 천부레이의 막내딸 천롄(陳蓮)에게 접근시켰다. 웬융시는 서남연합대학의 학생운동 지도자였고 미남이었다. 금 한 냥을 공작금 겸 결혼자금으로 지원했지만 천롄이 한눈에 반해 버리는 바람에 공작이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다. 베이징 시장이 보증인이 되어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이 체포된 뒤 천부레이는 침묵했다. 몇 달 후 장제스에게 “부녀 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연말에 “너의 사위는 공산당원은 아니다”는 장제스의 답신을 받았다. 딸과 사위가 연이어 출옥했다. 장제스의 새해 선물이었다.

그해 쌍십절, 천부레이는 딸과 사위를 데리고 쑨원(孫文)의 무덤을 참배했다. 동상에 절한 후 계단을 내려오던 그는 탄식하며 한마디했다. “석양이 참 좋기도 하구나(夕陽無限好).” 그날 그의 입에서 나온 유일한 말이었다.

11월 13일 아침 천부레이는 사위에게 전화를 했다. “이발을 자주해라. 그리고 정치라는 것은 할 게 못 된다. 너와 자손들 모두 근처에도 가지 말도록 해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제스에게는 한 통의 유서를 남겼다.

장례를 치른 후 천롄 부부는 상하이로 나왔다. 지하당은 이들을 당 중앙 소재지인 시보포(西柏坡)로 보냈다. 1949년 2월 3일 중공의 베이징 점령 3일 후 베이징에 들어와 ‘공청단(共靑團)’ 중앙(中央)에 일자리를 분배받았다.

문혁이 일어나자 천롄 부부는 강제로 이혼당했다. 얼마 후 천롄은 투신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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