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첩보전>上.총성없는 전쟁 그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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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제 산업스파이전은 경쟁기업간 문제를 넘어 국가차원으로 접어들고 있다.지난 봄 미-일 자동차협상때 미 중앙정보국(CIA)이 일본 대표단의 전화를 도청했다는 최근의 외신보도는 냉전종식이후 더욱 치열해진 경제첩보전의 실상을 상징한다.
그 치열한 접전(接戰)현장과 우리의 현실을 3회에 나누어 싣는다.[편집자 註] 지난 6월 26일 밤 제네바.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통산상에겐 유난히 힘든 하루였다.피로 때문만은 아니다.회담장에서 마주앉았던 미무역대표부(USTR)미키 캔터대표의 입가에선 뜻모를 미소마저 느껴졌었다.일본측이 들고 있는 패를 캔터가 다 읽고 있다는 느낌이었다.이 쪽의 정보가 새나가는 것은 아닐까.앞으로는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도쿄(東京)로 전화하는 것도 삼가야겠다고 생각한다.최근 미-일 자동차협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도청사건 보도를 종합,재구성해 본 당시 상황이다.미중앙정보국(CIA)이 일본측 협상단의 내부정보를 모조리 도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미 언론에 의해 보도된 후 일본정부가발칵 뒤집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협상테이블에 앉은 캔터대표는매일 CIA도쿄지부와 전자첩보부서가 전 해주는 일본의 움직임을손바닥에 올려놓듯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한국의 고속철도 기종수주를 둘러싸고 독일 지멘스사와 프랑스 알스톰사는 날카로운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그러나 지멘스사의 하인리히 포 피러사장은 느긋했다.
이미 콜 총리와 바이츠제커대통령까지 줄줄이 방한해 엄호사격까지 마친 상태다.김영삼(金泳三)대통령도 독일에 호의적인 발언을아끼지 않았다.프랑스 미테랑대통령도 물론 방한,알스톰 지원에 발벗고 나섰지만 기술적 우위를 자부하고 있던 터 라 드디어 독일이 자랑하는 고속전철(ICE)이 최초로 외국땅을 누비며 그 위용을 선보일 날만 남은 것 같았다.그러나 곧 피러사장은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차량기종이 알스톰사 것으로낙찰된 것이다.
문제는 차관제공 조건에 있었다.알스톰의 입찰가는 23억달러로지멘스와 비슷했다.그러나 알스톰은 계약금액 전부를 연리 6%대의 파격적인 조건에 빌려주겠다는 단서를 덧붙였다.지멘스도 입찰가를 다시 10% 더 낮추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피러사장은 어금니를 깨물었다.누군가 지멘스의 입찰내용을 미리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보안은 철저했다.일개기업의 정보수집능력으로 빼낼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최근 그 배후가 밝혀졌다. 프랑스의 정보기관 대외안보총국(DGSE) 이 도사리고 있었다.최근 독일의 유력신문들은 DGSE가 지멘스의 응찰내용이적힌 팩스를 중간에 가로채 알스톰에 전해주었다고 폭로했다.
몇달전 에어 프랑스사는 승객들의 거친 항의를 받고 어쩔 줄 몰라했다.초음속 여객기 콩코드안에서 벌어진 소란이 그 원인이다.1등석에 느긋이 앉아가던 한 승객이 발을 뻗다가 무엇이 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의자 밑을 들춰본 결과 기묘한 물체가 붙어있었다.도청장치-.
1등석의 주요 승객은 고위 정부인사 아니면 최고경영자.누구나안전하다고 믿는 1등객실에서 정부나 기업의 주요기밀을 빼내려는의도임이 뻔하다.어느 정보 기관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1등석도 안전지대가 아니란 사실만 큼은 분명해졌다. 독일 하노버시에는 이바노비치라는 회사가 있다.러시아.독일 합작으로 설립된 이 기업은 겉으로는 전자부품과 가전제품을 취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정보기관이 세운 유령회사다.이 회사직원들의 임무는 물론 제품거래가 아니다.
해마다 열 리는 세계적인 컴퓨터박람회인 하노버메세등 신제품전시장에 접근,산업기밀을 빼내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독일 언론들은 이처럼 세계 각지에서 암약하는 러시아 산업첩보요원이 무려 10만여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모든 국가가 자국 기업에 이익이되는 정보수집에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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