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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성북동 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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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04면

오원 장승업 작 ‘오동폐월(梧桐吠月: 오동나무 아래에서 개가 달을 보고 짖다)’, 견본담채/오원 장승업 작 ‘삼인문년(三人問年: 세 사람이 나이를 묻다)’, 견본채색

5월 18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성북동 성북초등학교 정문 옆 간송미술관(02-762-0442)은 잠시 100여 년 전으로 시간을 이동한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풍스러운 유리 진열장 안에 오원 장승업과 그의 후학들 그림 100여 점이 빼곡하다. 고서화가 즐겨 다룬 낡은 소재는 여전하지만 오늘 우리가 보고 느끼는 시선과 그리 다르지 않은 화면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오동나무 아래서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짖는 개의 모습(장승업의 ‘오동폐월’)이 살갑다. 가을밤의 서늘한 정취가 피부에 와 닿는 듯하다. 말이 뛰놀고(장승업의 ‘호치비주’), 새가 우짖는(장승업의 ‘군연농춘’) 여덟 폭 병풍 그림을 죽 이어 지나가노라면 활동사진을 보는 듯 마음이 즐거워진다.

엉성한 듯 재기 발랄한 그림 맛이 눈에 착 감긴다. 슬근슬근 붓질 소리가 들려올 듯 감각적인 화면에 술 냄새 살짝 밴 풍자와 해학이 번져난다. 옛날 그림이되 오늘의 감성을 지녔으니 오원 장승업은 19세기 말에 20세기를 이미 내다본 화가라 할 수 있다. 시대의 물결이 그의 몸을 밀어냈음일까.

전시를 기획한 최완수 연구실장(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은 당대에 오원 그림이 인기를 모으고 많이 팔려나가게 된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오원이 태어나 살던 시기는 조선왕조가 500년 천수를 누리고 쇠망해 가느라 척족세도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죠.

일찍이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멸망을 예견하고 새 사회를 주도해 갈 새 이념으로 청조 고증학을 수용해 추사체라는 새로운 서화양식을 창안했는데 글씨에서는 상형적 회화미를 배가시키고 그림에서는 함축적 감필미(減筆美)를 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과거 학예에 대한 광범위한 검증 작업을 거쳐야만 가능한 일이었고 중국서화를 섭렵하는 것이 수련의 기초였죠.

오원 역시 감필체의 추상화풍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무학(無學)이었던지라 감각적으로 회화미를 표출하는 능력으로 추사체를 좇아갑니다. 더욱이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 노골화돼 조선 성리학은 물론 청조 고증학까지 서구 이념에 의해 부정당하고 이념 공백기를 맞고 있던 조선 말기 상황에서 이런 오원의 그림은 크게 환영받게 되죠. 학식 있는 사대부층의 몰락과 중서(中庶) 상공인 및 부농의 부상으로 수요층의 취향이 일변한 것도 한 원인입니다.”

서울의 경제 환경 변모에 따라가던 화단이 1894년 개혁파에 의해 주도된 갑오개혁으로 도화서가 폐지되며 큰 변혁을 맞게 된 것도 오원 같은 상업화가가 각광받게 된 요인이다. 전직 도화서 화원들이 광통교라는 서화 유통 공간에서 자신들의 회화를 본격적으로 펼쳐 보이기 시작했고, 그림이 사고팔리면서 다량 제작이 필요해진 것이다.

전시와 함께 나온 연구도록 ‘간송문화(澗松文華)’에 ‘오원 장승업 일파의 회화’를 쓴 김현권(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씨는 “장승업 역시 광통교 부근에 ‘육교화방’이라는 개인 화실을 열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가며 제자를 길렀다”고 설명했다.

이곳을 찾아온 이가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과 소림(小琳) 조석진(1853~1920)으로 두 사람은 글을 쓸 줄 모르던 오원의 그림에 대신 제발을 쓰고 스승을 이어 조선서화협회를 조직한 뒤 오원 화풍을 잇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들의 작품과 함께 직접 지도를 받지는 않았지만 오원 화파로 묶이는 지운영(1852~1935), 강필주(1850년대~?)의 그림을 나란히 볼 수 있다.

최완수 연구실장은 “심전의 제자가 홍익대 동양화과를 창설한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과 서울대 동양화과를 만든 심산(沁山) 노수현(1899~1978)이란 사실은 이번 전시회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며 “현재 한국 동양화의 근원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보고 생각해야 할 전시회”라고 말했다. 오원 장승업이 시대의 격랑 속에 홀로 부대끼며 휘두른 붓질 속에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이 용틀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원은 천재임을 자각하지 못한 천재였을까.

현대 한국 동양화의 맥은 어디서부터 뿌리를 찾아야 할까. 조선왕조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혼란기에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던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이 그 시조임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열린다. 봄·가을 정기전으로 한국 미술의 정수를 정리하고 있는 간송미술관 2008년 봄 기획전 ‘오원 장승업 화파전’이다. 구한말 시대의 바람 속에 홀연히 야생화처럼 피었던 화가 장승업은 지금 우리 속에 얼마나 씨 뿌리고 있는가.


女色과 美酒와 그림만을 벗 삼아

오원 장승업은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인물의 풍모를 닮았다. 기록은 적고 일화는 많다. 기행으로 점철된 화가의 쉰네 해 일생은 ‘이러저러했다더라’는 풍문형 서술로 이어진다.

오원의 삶과 예술을 그나마 전문가의 눈으로 서술한 이는 화가이자 작가인 근원 김용준(1904~67)이다. 1948년에 펴낸 수필집 『근원수필(近園隋筆)』에 ‘오원일사’란 글을 실어 선배 화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선과 필세에 대한 감상안을 갖지 못한 나로서도 오원화(吾園畵)의 일격에 여지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오원을 논하고 그의 전기를 쓸 진지한 연구가가 후일 나타날 것으로 믿고 나는 오직 그를 추모하는 나머지 지금 이 일문을 적는 데 불과하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오원의 외모부터 묘사한다. “그는 얼굴 모습이 약간 기름한 데다가 조선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노오란 동공을 가진 것과 주독 때문인지 코끝이 좀 불그스름하고 우뚝한 코밑에는 까무잡잡한 수엽이 우스꽝스럽게 붙은 것이 특색이었다… 쨍쨍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거나하게 술이 취하여 세상사가 어찌 되든 나에게는 언제든지 청풍과 명월이 있다는 듯 소방(疎放)한 걸음걸이로 발을 옮겨 놓는 것도 보는 사람의 흥미를 끌거니와 그는 취월(청록에 가까운 빛) 창의를 입었다는 것이 더욱 이채였다.”

근원에 따르면 오원은 천애 고아로 역관이었던 이응헌(李應憲)의 집에서 심부름꾼으로 기식하며 어깨너머로 그림을 익혔는데 글을 배우지 못했음에도 눈썰미가 좋아 한번 본 그림은 뇌리에 깊이 새긴 뒤 제 그림 세계로 바꿀 줄 아는 타고난 천재였다. 그는 화가들의 호에 원(園) 자가 많은 것을 보고 ‘나도 원 자를 붙여 보자’ 하여 스스로 ‘나도 원’이란 뜻의 오원(吾園)이라 하였으니 한번 화명(畵名)을 날리매 그림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조석으로 성시를 이뤘다.

오직 여색(女色)과 미주(美酒)와 그림뿐이 그의 유일한 벗이었으나 그렇다고 그림에 붙들리는 법이 없이 무심하였다고 한다. 오원의 그림 솜씨가 장안에 소문이 나자 그의 그림을 사랑하던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의 추천으로 고종 황제께 불려가나 갇혀 있는 삶을 참을 수 없던 오원은 부귀영화를 차버리고 여러 차례 도망을 가버린다.
오원은 54세로서 몰(歿)하였다고 하나 죽은 것이 아니라 행방불명으로 사라졌다고 하는 말이 더 믿음직하다. 근원은 애틋하게 그를 추모한다.

“이리하여 오원은 전생의 숙업인 것처럼 배운 적 없는 그림에 천성으로 종사하다가 그 세상을 버림이 또한 신선이 잠깐 머물다 가듯 하였으니… 너무나 기발한 그의 생애가 마치 신화 속의 인물이나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일종의 신비적인 선모심(羨慕心)을 자아내게 한다. 아마도 오원은 신선이 되었나 보다.”

‘정치학자 이용희’이자 ‘미술사학자 이동주’로 산 동주(東洲) 선생(1917~97)은 저서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에서 오원을 “한말 최대의 화가일 뿐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도 손꼽을 수 있는 화가”라 평가한다. 장지연의 『일사유사(逸事遺事)』에 일화가 많이 나와 있다고 소개한 동주 선생은 “오원은 글씨를 못 써서 오원 낙관으로 되어 있는 대필이 참 많다”며 “그런 식으로 일자무식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림으로만 이렇게 유명했느냐 이것이 생각해 볼 것”이라고 지적한다. 근원의 말 속에서 그 대답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일자무식이면서라도 먼저 흉중의 고고특절(高古特絶)한 품성이 필요하니 이 품성이 곧 문자향이요 서권기일 것이다. 오원의 그림은 여기서 나왔다. 좋은 작가는 의재필선(意在筆先)하는 정신 속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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