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이중·삼중 ‘권력 안전판’ 깔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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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호 13면

“결국 자리와 사람이었다.”

메드베데프 내각 요직마다 심복…집권당 총재까지 맡아

러시아의 모스크바 정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열흘 동안 ‘상왕(上王) 체제’를 다지는 과정을 압축한 말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7일 취임했지만 푸틴의 권세는 여전히 위풍당당하다. 러시아는 세계 1위의 에너지(원유·천연가스·석탄·우라늄) 수출국, 세계 2위의 핵 보유국이다.

로이터 통신은 최근 “메드베데프가 운전석에 앉아 있지만 푸틴이 속도와 방향·브레이크를 좌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메드베데프를 모셔야 할 크렘린(대통령궁)과 내각에 푸틴의 손짓 하나로 움직이는 심복들이 배치됐기 때문이다.

헌법대로라면 러시아에서 대통령은 ‘국가 권력체계의 정상’이다. 하지만 푸틴 퇴임 이후 권력은 크렘린에서 총리실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12일 발표된 내각 명단과 고위 직 인사를 뜯어보면 푸틴 측이 치밀하게 ‘상왕(上王) 시대’를 준비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중 푸틴의 최측근 심복으로 손꼽히는 세르게이 나르슈킨(53) 전 부총리를 대통령 행정실장(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에 발탁한 것은 의표를 찌른 인사로 평가된다. 나르슈킨은 푸틴·메드베데프와 고향(상트페테르부르크)이 같다. 그는 옛 소련 시절 푸틴처럼 연방보안위원회(KGB) 해외공작 분야에서 일했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푸틴 집권 시절엔 4년간 부총리로 일했다. 나르슈킨은 앞으로 국영 채널1TV 회장과 최대 국영 석유업체 로스네프트 부회장을 겸임한다.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에는 KGB 출신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푸틴의 정치전략 담당 책임자), 외교관 출신 알렉세이 그로모프(푸틴의 언론담당 책임자)를 발탁했다. 결국 메드베데프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푸틴의 심복들 앞에 노출하게 됐다.

나르슈킨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푸틴의 첫 포석은 실로비키(군·정보기관 출신들)를 주축으로 한 측근들을 크렘린과 내각에 집중 배치한 것이다. 푸틴은 총리 취임을 앞두고 부총리 자리를 2개 더 늘린 7개로 만들었다. 총리실을 확대 개편해 총리 권한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고리 슈발로프 대통령 경제보좌관, 세르게이 소뱌닌 전 대통령 행정실장, 이고리 세친 전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이 크렘린에서 내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부총리에 발탁됐다. 알렉세이 쿠드린(재무장관 겸임) 부총리도 ‘푸틴 맨’이다. 그는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계에 입문할 때 나르슈킨을 푸틴에게 소개해준 인물이다.

푸틴이 메드베데프를 옥죌 카드는 또 있다. 바로 ‘의회 권력’이다. 푸틴은 국가 두마(하원 격)를 장악한 집권당 ‘통합 러시아’의 총재 직까지 맡았다. 만의 하나 두 사람 사이에 권력 투쟁이 일어날 경우 푸틴은 집권당을 통해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는 315석(총 450석)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푸틴에게 정치를 배우고 푸틴에게 권력을 넘겨받은 메드베데프가 반기를 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야말로 이중·삼중으로 권력의 안전판을 깔아놓은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에피소드도 속출하고 있다. 우선 내각 각료를 인선하면서 푸틴이 사실상 결정권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2일 각료 명단을 제출하기 위해 대통령실을 방문했을 때 푸틴은 무심코 자신이 대통령 시절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메드베데프는 ‘손님 의자’에 앉았다. 푸틴이 “이제 이 자리는 당신 것인데…”라고 말하자 메드베데프는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상석을 양보했다. 푸틴은 8월 베이징에서 열릴 2008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할 예정이다. 각국 정상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메드베데프가 아닌 푸틴이 재등장하는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 경제의 근간인 석유산업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있다. 그는 14일 “원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세제를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5년까지 산유량(지난해 4억9148만t, 하루 972만 배럴)을 13.6% 더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그의 곁에는 핵심 측근이자 에너지 분야를 책임진 세친 부총리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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