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세계화와 민주화의 샌드위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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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지면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의 세세한 잘잘못을 또다시 거론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뜨거운 문제를 좀 더 긴 호흡에서 바라볼 필요는 있다. 필자는 미국 쇠고기 이슈는 얼마 전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던 중국 유학생들의 폭력시위와 마찬가지로 세계화의 빛과 그림자, 더 나아가 세계화와 민주화의 복잡한 패러독스를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본다.

원래부터 양날의 칼을 가진 세계화가 더욱 복잡해진 것은 우리 사회의 진전된 민주화와 만나기 때문이다. 쇠고기 수입 파동에서 보듯 세계화는 기업과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의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둘러 진행된 쇠고기 수입에 대한 시민의 거센 저항은 세계화에 대한 민주주의의 강한 압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세계화에 대한 민주화의 압박은 또한 지극히 선별적이기도 하다. 수많은 중국 유학생의 존재는 21세기 한국 세계화의 위상을 보여주지만, 이들은 실제로는 한국 사회와 민주주의의 외곽에 버려져 있었다. 모두들 중국 유학생을 받아들이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이들에게 민주적 가치를 심어주고, 나아가 우리의 소프트 파워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노력과 관심은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아직도 세계화와 민주화라는 두 갈래의 큰 흐름이 선순환하는 공식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한 켠에 개방과 국제경쟁력만이 살 길이라는 순진한 세계화론자들이 있다. 하지만 민주화 20년간 비판 능력을 키워 온 시민들을 단순한 낙관론으로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한 켠에는, 조금 덜 잘 살더라도 나라의 빗장을 걸어잠그고 우리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낫다는 반(反)개방론자들의 비현실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순진한 세계화론이나 답답하기 그지없는 반개방론을 넘어, 세계화와 민주화의 두 물줄기를 하나로 모으는 ‘솔로몬의 균형점’을 찾는 일은 비단 이명박 정부만의 과제가 아니다. 이는 바깥 세계에 깊이 연결돼 있으면서 동시에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우리의 미래가 달린 문제다.

적어도 두 가지의 변화가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첫째, 개방정책을 추진하는 정부는 국민의 변화하는 가치구조를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 경제 살리기>개방정책>시민 설득의 우선순위를 가진 정부와 삶의 질>경제 살리기>개방정책의 가치구조를 지닌 시민 사이의 눈높이 조절이 절실하다. 지속적인 성장과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리면서 성장해 온 시민들에게 오늘날 가장 높은 순위를 갖는 것은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자율, 자연 친화 같은 이슈다.

21세기 정치의 세계적 추세는 새로운 ‘생활가치 따라잡기’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주 중국과 일본의 지도자가 도쿄에서 합의한 중·일 공동성명에 ‘식품의 안전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문구가 들어갈 만큼 생활 이슈의 위상은 높아져 있다. 또한 오랜 야당 신세를 접고 조만간 권력에 복귀할 것으로 점쳐지는 영국 보수당의 새로운 기치는 ‘일상생활과 사회 중심의 정치’다. 영국 보수당은 가족, 이웃의 안전과 유대감의 회복이라는 소박한 구호를 통해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둘째, 정부의 변화 못지않게 시민의 변화도 아울러 요구된다. 이번 쇠고기 수입파동이 극명하게 보여주었듯, 통상 이슈를 포함한 대외 개방정책은 이제 더 이상 정부가 독점적으로 비밀스럽게 주도하는 ‘비원(秘苑)의 외교’가 아니다. 세계화 정책은 시민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되는 ‘민주화의 광장’으로 나온 셈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이제 민주화의 광장을 참여와 책임의식이 공존하는 공론장으로 가꾸어가야 한다. 광장이 단지 촛불시위와 댓글, 단순한 퍼나르기만으로 가득 차도록 놔두어서는 곤란하다. 이성적인 토론과 책임있는 행동만이 민주주의를 지탱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세계화와 민주화가 서로 발목을 잡기보다 윈-윈(win-win)하는 공식을 찾아내는 것이 어려운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민주화를 희생한 채 세계화를 수용한 싱가포르의 ‘부자유스러운 풍요’가 우리의 대안은 아니다. 또한 세계화를 포기한 채 민주화만을 붙들고 있는 몇몇 남미 국가들의 ‘자유 속의 빈곤’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니다. 모두가 각별한 인내심과 신뢰를 발휘할 때에만 우리는 샌드위치 신세를 벗어날 수 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