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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플라톤·루소도 알고보면 … 고전의 ‘속살보기’ 재밌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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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책에 관한 책’이 출판의 한 장르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서평·해제집은 물론 독서법, 역사에다 책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판타지까지 ‘책에 관한 책’이 쏟아진다.

이 책도 이런 류에 속한다. 미국의 영화평론가가 썼는데 목차를 보면 호메로스, 사포, 단테,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등 어지간해서 ‘세계문학전집’에 빠지지 않는 작가들이 나온다. 플라톤, 존 로크, 칸트, 헤겔, 니체, 마르크스까지 이름은 친숙하지만 좀처럼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상가들도 함께 자리했다. 그러니 이를 보고 그렇고 그런 독서에세이라 치부하거나 대입 논술시험용으로 여겨 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다르다. 진지하긴 하지만 제법 유머러스해 엄숙한 서평집이라 하긴 아깝고, 나아가 논술시험 대비를 위해 책을 펼쳤다면 실망할 우려도 있을 만큼 자유분방하다. 대신 인문학의 즐거움을 일깨우며 고전의 ‘재발견’을 돕는다.

“명심해야 할 것은, 민중은 보듬든지 아니면 씨를 말리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은 사소한 피해에는 보복하려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는 보복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가할 때는 그 사람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군주론』)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의 대표작 『군주론』을 20년도 더 전에 읽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이 대목만 읽어도 『군주론』을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이런 구절은 어떨까. “아첨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당신에게 진실을 고해도 당신이 결코 노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가 당신에게 서슴없이 진실을 고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들의 존경을 잃게 된다.”(『군주론』) 요즘 우리 사회의 돌아가는 꼴과 관련해 『군주론』 자체를 다시 읽고 싶게 만드는 대목 아닌가.

지은이는 마키아벨리가 잔악함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정치 현실의 속성을 기술했다고 평한다. 또한 “군주에게, 우리 대부분이 정치적 도덕성이라 부르는 단순함과 일관성은 가능하지 않다”며 『군주론』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정신적 환경과 아주 가깝다고 지적한다. 이 정도면 요즘 우리 사회의 정치평론이라 해도 통할 지경이다.

사실 지은이는 이런 거대 담론을 논할 처지가 아니다. 문학과, 다양한 분야의 사상을 비교 분석할만한 전문성을 지닌 학자가 아니어서다. 그렇다고 대단한 독서가도 아니다. 소설가인 아내에 비해 비(非)독자라고 자처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나름의 깊이가 있다. 혼자 읽고 감상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실은 집단독서에 가까운 덕분이다.

영화평론가로 제법 이름을 얻은 지은이는 40대 중반의 어느 날 ‘중년의 위기’를 맞는다. 게다가 기껏해야 신문· 잡지· 이런 저런 에세이나 읽으며 미디어가 제공하는 ‘덧없고 불안정한 정보’에 젖어 ‘지식 없는 정보, 원칙 없는 견해, 믿음 없는 본능’만을 가지게 되었음을 절감한다. 요컨대 정체성에 회의를 갖게 된 것이다.

탈출을 위해 여행을 하거나 십대 소녀를 유혹하거나 하는 대신 의미 있는 방식을 택하고 싶었던 지은이는 진지한 읽기를 위해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의 인문학 강좌를 듣기로 한다. 1991년 일이다.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문학과 인문학’ ‘현대문명’ 두 강좌를 일년 간 들은 결과를 수록한 것이 이 책이다. 지은이의 감상에 교수 강의와 학생들 발언이 곁들여져 전문성 부족을 상쇄한다. 지은이는 자신의 책을 “모험기이며, 천진난만한 아마추어의 책”이라 평하지만 이는 겸양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로잡은 책을 쓰되 지겨울 때는 지겹다고 쓴 솔직한 태도며, 온갖 ‘이론’을 배제하고 자신의 느낌과 강의실에서의 토론 내용을 충실히 기록한 객관성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

“플라톤, 성경, 루소, 마르크스 등이 오랫동안 살아남았다는 것은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정치적 승리를 거둔 전통 속에 속해 있다는 증거”라는 지도교수의 말처럼 이른바 ‘고전’에 관한 기존 관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그런 예다.

그렇다고 딱딱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어드』를 다루며 ‘대빵’에 불만을 품고 전투를 거부한 아킬레스의 분노는 신성하다기보다 허영에 들뜨고 이기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나아가 그의 엉뚱한 몰입은 젊었을 적 말론 브란도의 매혹적인 부루퉁한 연기를 떠올리게 한다고 적는 식이다. 또 교수의 질문을 받을까봐 고개를 숙인 채 노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는 지은이나 책을 읽지 않고 강의에 참석해 쩔쩔매는 학생들의 모습 등은 슬며시 웃음을 자아낸다.

물론 한계도 있다. 다룬 책이 서양 고전 일색이란 점이 대표적이다. 실제 책이 쓰여진 90년 대 미국에서도 여성· 소수 인종 중심으로 그런 비판이 드셌던 사실을 책 곳곳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죽은 백인 남성’들이 쓴 책이니 하면서 말이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지도교수의 말을 빌어 대답한다. “서양문명은 종교전쟁, 노예제, 나치즘 그리고 인종 대학살을 불러왔지만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가져오기도 했지. 이 책들은 좋기도 하고 동시에 나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지만, 또한 문명의 정수야”라고.

인문학 고전을 읽는다 해서 눈에 띄는 소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 ‘투자’를 하는 데 도움이 될 리도 없고 광우병 파동에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고전 자체도 아닌, 이런 책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헛수고일지 모른다.

하지만 인문학은 우리 삶을 살찌우고, 세상을 보는 우리 시각을 바로 세우고, 우리의 자아를 형성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이 책은 논술시험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순수하게 책 읽는 기쁨과 황홀로 이끌어준다.

사족. 이 책은 꼭 10년 전에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란 이름으로 번역돼 나왔지만 ‘IMF위기’ 탓인지 널리 읽히지 못했다.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국내 대학에는 일년짜리 고전독서 강좌는 없는 것으로 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성공회 사회선교국이 함께 여는 ‘독서대학 르네21’(www.renai21.net)이 비교적 이에 가깝다 하겠다.

김성희 고려대학교 초빙교수·언론학 jaejae@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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