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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중국문화지도 <20> “국가는 멸망해도 신앙은 반드시 존재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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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 중국식 사회주의와 종교의 동거 2. 중국 5대 종교 현장을 찾아서

중국에는 5대 종교가 있다. 도교, 불교, 개신교, 천주교, 이슬람교다. 그외 다른 종교를 중국 정부는 인정하지 않는다. 단, 유교는 다르다. 중국에서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생활 속에 녹아 있는 문화와 사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중국 공산당은 무신론자다. 신앙이 없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공산당과 종교는 정치에서는 단결·합작하고, 신앙에서는 상호 존중한다”는 규정을 세워놓고 있다. 장쩌민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국가는 멸망해도, 종교는 꼭 존재한다”는 말까지 했다.

과연 사회주의 중국의 종교 현장은 어떨까. 사람들은 어떻게 기도를 할까. 성직자는 또 어떤 모습일까. 사원과 예배당은 또 어떻게 생겼을까. ‘21세기가 중국 문화 지도’가 중국의 5대 종교 현장을 돌아봤다.

베이징·난징 글·사진=백성호 기자

불교
‘선불교 종주국’ 정부서 적극 지원

중국 광저우의 남화선사. 육조 혜능 대사가 주석했던 절이다.

중국 광저우(廣州)의 남화선사. 중국 대륙에 ‘선의 전성시대’를 일구었던 육조 혜능 대사가 주석했던 사찰이다. 찾아오는 신도들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선(禪)을 향한 갈구’는 읽히지 않았다. 하나같이 불붙은 향을 잡고서 복을 빌 뿐이었다. 중국인 특유의 기복적 성향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래도 남화선사는 달마 대사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의 선맥을 상징하는 곳이다. 대체 ‘동북아 선불교의 종주국’을 자처했던 중국의 선맥은 어디로 간 걸까. 답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스님들은 대부분 환속을 당했다. 그나마 일부 승려가 산 속으로 도망을 치거나, 승복을 벗고 사찰을 지키는 관리인으로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그러니 중국 사찰에서 선의 숨결을 찾기란 쉽진 않은 일이다. 그래서 저장성(浙江省) 승려들의 자부심이 높다고 한다. “험한 산이 많은 절강성에는 환속하지 않은 스님들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게 그 이유다.

그래도 중국 불교는 야심이 크다. 최근 중국 정부는 불교계에 ‘뜨거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동북아 선불교의 종주국’으로서 국제적 위상도 되찾고 싶어한다. 2006년 4월에는 세계 각국에서 1000여 명의 스님이 참여한 제1차 세계불교포럼을 항저우(杭州)에서 개최했다. 거기에는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가 힌두교 국가가 됐으니, 세계 불교의 종주국은 이제 중국이 맡아야 한다”는 시각이 깔려있다.

최근에는 동남아 지역의 홍콩·타이완 사찰의 분원에도 중국 본토의 승려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다. 법산 스님(전 동국대 불교대학원장)은 “타이완과 홍콩은 출가자들이 갈수록 줄고 있다. 반면 중국 본토의 승려 수는 증가 추세”라며 “최근 동남아 일대의 중국계 사찰의 승려가 본토의 젊은 승려들로 대체되고 있어 놀라울 정도”고 말했다. ‘아시아 불교의 맹주’ 자리를 되찾으려는 중국의 야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급증하는 불교 신자 수는 중국 국가종교사무국도 “수치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도교
기복적 성향 강한 가장 오래된 종교

중국 주롱시의 모산도원 주위에 세워진 노자상.

중국 베이징 시내에 있는 도교사원 백운관(白雲觀)을 찾았다. 도교에는 두 문파가 있다. 전진파(全眞派)와 정일파(正一派)다. 백운관은 도교 북파(北派)를 대표하는 전진교(全眞敎)의 총본산이다. 도원 안으로 들어섰다. 놀라웠다. ‘도교’가 사상뿐 아니라, 종교로도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원의 규모는 무척 컸다. ‘칙건백운관(勅建白雲觀)’이란 현판도 눈길을 끌었다. 황제의 명으로 세운 사원, 건축 양식도 황궁 양식을 따랐다고 한다.

젊은 도관들이 일행을 맞았다. 그들은 영화 ‘천녀유혼’에 나오는 장궈룽(張國榮)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백운관’의 뜻이 뭐냐?”고 물었다. 도관은 “‘백운’은 장자의 책에 나오는 말이다. 도교에선 구름을 천국에 올라가는 계단으로 본다. 이 사원을 통해 천국에 다가서라는 뜻”이라며 “반면 바람은 구름을 흩어지게 한다. 그래서 도교 수행자는 ‘바람’을 경계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무척 젊었다.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린 후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젊은 세대였다. 백운관 사원에는 불교 사찰에 ‘대웅전’이 있듯이 ‘옥황전’이 있었다. 옥황상제를 모신 곳이었다. “도교에선 가장 높은 이가 옥황상제인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뜻밖의 답이 날아왔다. “도교에서 옥황상제는 산천 밑에서 가장 높은 이로 본다. 그러니 가장 높은 이는 옥황상제가 아니다. 도교에서 가장 높은 건 바로 ‘타오(도·道)’다.”

그 말을 듣자 도교가 뜬구름 잡는 종교가 아님을 절감했다. 실제 옥황전 뒤에는 ‘도(道)’를 모시는 ‘칠선전’이 있었다. 중국 사원은 대개 뒤로 갈수록 중요한 전각이 나타난다. 젊은 도관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그는 “모든 타오이스트(도교 신자)는 나이가 없다. 우리는 우주의 기원, 그 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그가 명함을 한 장 건넸다. 영어 이름이 ‘HEVEN’이었다. ‘HEAVEN(천국)’에서 ‘A’가 빠진 단어였다. 이유를 물었다. “나와 천국, 그 사이에 간격이 있다. 그 간격을 메우려는 지향을 잊지 않으려고 ‘A’를 뺐다.”

사원을 찾는 신자들도 많았다. “중국에 도교 신자가 얼마나 되느냐?”고 했더니 “수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춘절 때는 하루 6만 여명이 이곳을 찾는다”고 답했다. 중국에서 도교 사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불교 사원도 찾는 이들이다. 중국인 특유의 기복적 성향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주롱시(句容市)에 있는 모산도원도 찾았다. 그곳은 정일파의 대표적 도교사원이다. 주변에는 33m나 되는 노자상이 세워져 있었다. 서한시대에 세워진 이 도원에선 숱한 도사들을 배출했다고 했다.

이슬람교
“외국문물 수용 상징” 9000만 신도

베이징 시내의 이슬람 사원 청진사 예배당에서 여성 신자가 기도를 올리고 있다.

베이징 시내에도 이슬람 사원이 있을까? 있다. 이름도 흥미롭다. ‘청진사(淸眞寺)’다. 언뜻 들으면 불교 사찰 같다. 입구에 들어섰다. 깜짝 놀랐다. 이슬람 건축 양식에 중국의 전통 사찰 양식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외국 문물을 중국식으로 수용했던 중국 특유의 ‘소화력’이 강하게 느껴졌다. 청진사는 996년에 건립된 이슬람 사원이었다. 무려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셈이다. 당시 이슬람 선교사들이 중국에 와서 이슬람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공간이 무척 넓었다. 청진사의 이슬람 성직자는 “매일 200~300명씩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올린다. 이슬람교에선 하루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절을 한다”고 했다.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이 예배당에 1000명이 한꺼번에 예배를 올린다고 했다.

베이징의 이슬람 신자만 약 25만명이라고 했다. 또 안후이성(安徽省)에도 20만 명이 넘는 이슬람 신자가 있다. 중국에선 아예 그들을 ‘회족’이라고 부른다. 중국 전역의 이슬람 신자는 약 8000만~9000만 명이다.

청진사 안에는 여성 예배당이 따로 있었다. 남녀를 가르는 이슬람의 전통이 여기서도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청진사에는 중국의 이슬람 역사가 보관돼 있었다.

1000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슬람 경서들이 보관돼 있었다. ‘중국’하면 ‘도교’나 ‘불교’만 떠올리지만 이슬람의 역사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종교인평화회의 관계자는 “대제국을 건설한 당나라 때 중국이 이슬람 문화를 수용했다”고 설명했다.

당은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가 지향하는 역사 속의 이상적 모델은 당나라다. 당나라 때 중국이 경제·문화적으로 가장 강성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이슬람에는 ‘당나라의 재현’을 꿈꾸는 현대 중국의 지향도 보였다.

개신교
외국선교사 많지만 “선교는 불법”

중국 난징의 금륭협화신학원.

난징에 있는 금륭협화신학원을 찾았다. 1952년에 건립돼 56년의 역사가 흐르는 곳이다. 이 신학원은 3년제 신학 석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현재 재학생은 180명, 지금껏 1100명에 달하는 목회자를 양성한 곳이다.

금륭협화신학원의 가오잉(高英·여) 부원장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목회자의 절대적인 부족”이라고 말했다. 이유가 있었다. 난징의 교회 수는 10여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집회 장소는 100여 곳쯤 됐다. 가오잉 부원장은 “그런데도 난징시에는 목사 수가 10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래서 신학생들도 주말이면 난징 시내의 교회로 목회 실습을 나갔다. 신학원 규정에도 1년 이상 현장에서 일을 해야 목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목회자 부족’ 현상은 비단 난징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국 전역의 신학원 수는 18개, 목사 수는 약 4800명이다. 그중 여성 목회자는 400명쯤 된다.

이에 반해 중국의 개신교 신자는 1600만 명이나 된다. 신도 수에 비해 목회자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물론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 수는 많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들의 선교 활동을 ‘불법’으로 간주한다. 중국에선 ‘선교 행위’가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개신교는 또다른 특색도 있다. 교파가 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의 교회는 모두 중국기독교협회 산하에 있다. 가오잉 부원장은 “50년대만 해도 중국 개신교는 여러 교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중국은 ‘교파 시대’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각 교파는 소실됐지만, 예배 방식 등의 교파별 전통은 교회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중국종교인평화회의 관계자는 “우리는 그것도 서로 존중한다”고 말했다.

천주교
신부·수녀 해외유학 … 비약적 발전

베이징 시내에 있는 천주교 북당 성당.

1703년 중국 베이징에 설립된 북당 성당을 찾았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인 장 드 퐁타네 신부가 청나라 황제 강희제(康熙帝)의 학질을 고쳐 준 공으로 세운 천주교 성당이다. 베이징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중국에서 유일한 황가 성당이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李承薰)이 예수회의 그랑몽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했다.

초입부터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예배당 좌우에 중국식 전각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 양식이든, 천주교 양식이든 중국은 철저히 중국식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성당 벽에는 성모자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복장이 독특했다. 성모 마리아도, 아기 예수도 중국의 전통 복장을 입고 있었다. 성당의 좌우 기둥에는 큼직한 현수막에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하나는 ‘上主不拒絶自己的百姓(하느님은 자기 백성을 거절하지 않는다)’이었고, 또 하나는 ‘上主不遺棄自己的人民(하느님은 자기 인민을 버리지 않는다)’이었다.

중국인 신부는 “베이징에는 모두 17개의 성당이 있고, 베이징시의 천주교 신자는 5만 명 정도”라고 했다. 또 베이징 시의 신부 수는 56명, 수녀 수는 52명이라고 했다. 중국 전역의 성당은 6000여 개이며, 매년 100여 명의 신부가 새로 배출되고 있다. 중국종교인평화회의 관계자는 “최근 300여 명의 신부와 수녀를 해외 20여 개국에 유학을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다”며 “지난 20년간 중국내 천주교 발전이 그전의 400년간 있었던 발전보다 더 크다”고 말했다.

중국인 신부에게 물었다. “중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어떤 겁니까?” 그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성경에도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천주의 것은 천주에게 속한다’는 말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국가의 정책을 따른다. 그에 따른 모순은 없다. 그리고 신앙은 우리의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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