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야기] 식욕증진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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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게 먹어 본 게 언제지?’

식욕부진은 정신적·신체적 장애로 입맛이 떨어져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체중 증가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 자기 신체상(像)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원인인 신경성 식욕부진과는 구별된다.

신경성 식욕부진이 10대 여성의 질환이라면 식욕부진은 노인에게 흔하다. 노화로 미각이 떨어진 탓이다. 독감·결핵·갑상선 기능저하증·심장병·간질환·암 등의 증상으로도 올 수 있다(강남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김경수 교수). 각성제·이뇨제를 복용해도 곧잘 나타난다. 보통 식욕부진→영양 불균형→영양실조로 발전한다.

암환자는 특히 식욕부진을 심하게 경험한다. 전체 암환자의 63%가 식욕부진·체중 감소·영양실조 증세를 보인다는 미국의 조사 결과도 있다. 위암(87%)·췌장암(83%)·식도암(79%) 등 소화기계 암환자에게 잦다. 암환자의 영양 상태는 예후에도 영향을 미친다. 잘 먹어야 암이란 소모성 질환을 잘 이겨낸다.

어린이의 식욕부진은 흔히 영양 불균형→성장 부진·면역력 저하로 이어진다. 입이 짧은 어린이가 감기 등 감염성 질환에 잘 걸리고 키가 잘 자라지 않는 것은 이래서다. 젊은 여성의 과도한 다이어트로 인한 식욕부진도 문제다. 심하면 폭식증·신경성 식욕부진 등으로 생명까지 위협받는다.

식욕부진에 빠진 사람을 위한 ‘살찌는 약’, 즉 식욕증진제도 있다. 국내에서 이 목적으로 팔리는 약은 ‘트레스탄’(사진·삼진제약)·‘트레스오릭스훠트’(신일제약) 등이다. 외국 제품으론 ‘트레스오릭스포르테’(스페인 알미랄사)가 있다.

시판 중인 식욕증진제는 뇌의 포만중추에 세로토닌(신경전달물질)이 결합하는 것을 억제한다. 한두 숟갈만 먹어도 포만감이 밀려오는 사람에게 만복감을 천천히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비만치료제인 ‘리덕틸’이 세로토닌 분비를 증가시켜 식욕을 떨어뜨리는 것과는 반대다(한강성심병원 신경정신과 함병주 교수).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 분비가 적으면 식욕이 증가한다. 특히 살을 찌우는 탄수화물(당질)이 먹고 싶어진다.

식욕증진제는 의사의 처방 없이도 살 수 있는 일반약이다. 트레스탄의 경우 출시된 지 30년이나 됐다. 몇 년 전만 해도 연간 5억~7억원어치를 파는 데 그쳤으나 지난해엔 매출액이 35억원으로 늘어났다. ‘다이어트 전성시대’에 뜬금없이 식욕증진제가 기사회생한 것은 노인인구와 암환자의 증가, 키 크기 열풍 등에 힘입은 것으로 풀이된다.

식욕증진제에 주로 함유되는 성분은 항히스타민제(사이프로헵타딘)·비타민(비타민 B12)·아미노산(리신·카르니틴) 등이다. 이 중 사이프로헵타딘은 식욕중추를 자극해 식욕을 높이는 성분이다. 항히스타민 성분의 일종이어서 졸음을 유발한다. 비타민 B12(시아노코발라민)는 동물성 식품에만 존재하는 비타민으로 채식주의자는 반드시 따로 보충해야 한다. 부족하면 미각이 떨어진다. 리신은 신체의 성장에 필요한 필수 아미노산. 쌀·밀가루·옥수수 등 곡류의 단백질엔 부족하게 들어 있다. 미국에선 10세 미만의 어린이에겐 리신 보충제를 의사의 처방 없이 먹이지 말라고 권한다. 알레르기 유발 가능성이 있어서다. 카르니틴(아미노산의 일종)이 ‘살찌는 약’ 성분에 포함된 것은 의외다. 몸에 저장된 체지방을 에너지로 바꾸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시판 식욕증진제의 약효성분 중 항히스타민을 제외한 나머지는 식사를 통해 얼마든지 섭취 가능하다. 스스로 식욕부진에 빠졌다고 판단되면 먼저 신선한 채소·가벼운 운동으로 입맛을 되살려 보자.

박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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