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낙태 후진국 오명 벗어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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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리나라는 낙태 문제에 관한 한 후진국이다. 한 해 신생아 수의 78%에 이르는 태중 생명이 세상 빛도 보기 전에 목숨을 잃는다. 지구상에서 불법 낙태가 가장 성행하는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외국 언론들이 낙태 문제를 다룰 때 ‘불법 낙태의 천국’으로 지목할 정도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낙태 천국의 오명은 급속한 산업화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압축성장의 그늘에서 자라난 도덕적 해이는 성 개방과 생명 경시 풍조를 낳았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올바른 성교육을 받지못한 청소년들은 성관계를 스트레스 해소용 쯤으로 여기고 있다.

질병관리본부가 전국의 중·고교생 8만 명을 설문조사해 보니 5%가 성경험을 갖고 있었고, 이 중 성관계 시 피임을 한 경우는 38%에 불과했다. 청소년 상당수가 원치 않는 임신으로 불법 낙태 시술을 받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의료계의 배금주의는 이를 부추기고 있다. 인터넷에 버젓이 광고까지 띄워 불법 낙태 영업을 하는 산부인과가 부지기수다.

전통적인 우리네 남아 선호 사상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태아 감별을 법으로 금하고 있지만 아들을 낳기 위한 골라낳기 식 낙태가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태아는 헌법이 인격을 부여한 생명이다. 부모가 마음대로 없앨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하물며 돈벌이의 대상이 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낙태권을 여권신장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낙태 여성의 71%가 낙태후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여성의 육체 및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낙태는 삼가야 한다. 물론 피치 못할 경우도 있다. 모자보건법이 합법적인 낙태 사유로 정한 강간이나 혈족 간 성관계로 인한 임신 등이다.

낙태를 줄이려면 보육에 필요한 사회 인프라가 확충되어야 한다.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낙태를 택해야 하는 여성에게 국가가 출산을 장려하는 방법이다. 청소년에 대한 바른 성교육과 함께 불법 낙태에 대한 엄격한 법 집행이 병행되어야 한다. 시대 착오적인 남아 선호 사상도 이제는 버릴 때다.